17번 국도를 오가며
17번 국도를 오가며
  • 중부매일
  • 승인 2019.02.14 1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세이] 최시선 수필가
최시선 수필가
최시선 수필가

17번 국도! 난 이 길을 두 해째나 아침저녁으로 오가고 있다. 왠지 17번 하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듯하다. 행운의 숫자 세븐이 뒤에 붙어서일까. 국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홀수이면 남과 북을, 짝수이면 동과 서를 연결한 것이다. 그러니 17번은 남과 북을 연결한 것이다. 이 국도는 용인시 양지면에서 시작하여, 여수시 돌산읍에 이르는 총연장 길이 416.7킬로미터의 도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길을 간다는 것이다. 걸어서 가든, 차를 타고 가든, 비행기를 타고 가든 길 위를 간다. 사람이 만든 길은 목적지를 향해 있다. 마치 17번 국도가 북으로 갈 때는 용인을, 남으로 갈 때는 여수를 향해 있는 것과 같다. 그 길에는 수많은 차와 사람들이 동행하고, 산과 물과 바람이 스쳐간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간과 생각들이 지나간다. 그러면서 길 위에 한 사람의 삶이 순간순간 뿌려진다.

요즘에는 날씨가 추워서 관사에서 머물지 못하고, 매일을 이 17번 국도를 차로 오간다. 청주에서 광혜원까지 40킬로미터가 조금 넘으니 내가 다니는 길은 국도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길이 정말 잘 나 있다. 고속도로가 인근에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 국도를 이용한다. 문제는 아침에 차가 너무 밀린다. 오죽하면 오창 팔결다리 쯤 가서 논두렁길을 택하여 갈까. 말인즉 농로인데, 그냥 붙인 이름이 논두렁길이다. 농사철에는 트랙터나 경운기가 다녀 곤란할 때도 있다. 농부님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진다.

논두렁길은 논 사이로 나 있다.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고 거의 교행이 불가능하다. 여름이면 푸른 벌판으로 변하고, 가을에 황금벌판을 이루다가 겨울이면 텅 빈다. 논 곳곳에 공룡 알 같은 커다란 비닐 뭉치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추위가 밀려온다. 이 공룡 알 뭉치는 다름 아닌 볏짚을 말아놓은 것이다. 참 기술도 좋다. 기계로 벼 수확도 하고, 볏짚까지 비닐로 돌돌 말아 논 위에 턱 올려놓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어렸을 적 농사일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혁명이다.

어떤 때는 이 논두렁길도 밀릴 때가 있다. 밀리지 않을 때는 신나게 달리면서 위에 있는 17번 국도를 흘낏흘낏 보는 재미가 있는데, 밀릴 때는 피장파장이다. 특히 월요일이 심하다. 그러면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잠깐이나마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텅 빈 들판에 클래식이 울려 퍼진다. 베토벤도 좋고 모차르트도 좋다. 눈이라도 내리면 더욱 좋다.

논두렁길을 벗어나 이제 17번 국도로 다시 올라탄다. 오창 사거리에서 그렇게 밀려서 겨우겨우 온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차가 밀리더라도 논두렁길이 아닌 국도를 택한 사람들이다. 이 분들은 군자다. 군자는 대로행이라고 했으니 좁은 길이 아닌 큰 길을 택한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좀 더 빨리 가려는 요량으로 좁은 길인 논두렁길을 택했으니 군자가 되기에는 글러먹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17번 국도에서 달리기 시합이 시작된다. 1분 1초를 더 빨리 가기 위해 에스 자를 그리며 곡예 운전을 하는 사람, 뒤로 바싹 따라와 어서 비키라고 협박을 하는 사람, 그러거나 말거나 1차로를 우직하게 천천히 달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운전도 그 사람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 같다. 에스 자를 그리거나, 뒤에 바싹 따라와 협박하는 사람은 성격이 급한 사람이거나 출근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쫓아오거나 말거나 1차로를 유유히 기준 속도에 맞추어 가는 사람은 성격이 느긋한 사람이거나 간이 큰 사람이다. 모두 문제는 있다. 다 위험한 사람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차들이 멈추어 서 있다. 추돌사고다. 보통 몇 중 추돌사고가 일어난다. 이 추돌사고는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다. 그렇게 바싹 따라 붙어서 달리니, 앞의 차가 잠깐이라도 브레이크를 잡는 날이면 그냥 꽝이다. 안전거리 확보는 그래서 중요하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앞 차와의 거리는 충분히 두어야 한다. 느릿느릿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려서 가다보면 널브러진 차들이 가변에 세워져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틀림없이 에스 자를 그리거나 바싹 뒤를 따르던 차들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좀 더 빨리 가려다 낭패를 본 것이다.

나는 어떨까.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논두렁길로 가는 나로서니 별 다를 바가 없다. 허나 원칙이 있다. 2차선 도로에서 2차로는 주행선이고 1차로가 추월선이다. 2차로로 가다가 정 안되면 추월하는 게 맞다. 나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설령 1차로로 가더라도 충분한 거리를 둔다. 뒤에 바싹 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바로 비켜 준다.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말이 있다. 눈은 호랑이처럼, 걸음은 소처럼. 이것은 도로 위에서도 적용된다. 이것이 내 원칙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시 17번 국도를 탄다. 집으로 올 때도 밀린다. 그러나 그 길은 아름다운 길이다. 살면서 급하게 가야 할 때도 있지만, 늦더라도 얼마든지 좋을 때가 있다. 느릿느릿 팔결다리 쯤 왔을 때 석양 노을빛에 비행기가 날아간다. 그들은 하늘을 달리는 사람들이다.

약력
▶2006년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부회장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수필집 '삶을 일깨우는 풍경소리', '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진천 광혜원고등학교 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