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규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예전 공직에 있을 때 새기던 말이 있다.

"강제(强制)하지 마라."

'강제하다'는 '권력이나 위력(威力)으로 남의 자유의사를 억눌러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다.'란 말인데, 위력의 위(威) 자는 戌(술, 옛날에는 도끼 월(鉞)과 같은 글자)과 女로 이루어진 글자로 도끼(戌) 안에 갇힌 여자(女)를 뜻한다. 사방에 날 시퍼런 도끼(戌), 그 속에서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무릎 꿇고 앉아있는 여인(女)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까! 그래서 威(위)를 '힘', '위엄', '세력', '구박하다', '해치다', '협박하다', '두려워하다', '시어머니' 등으로 새기나보다.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말이 있다. '성 인지 감수성'.

성(性) 관련 사건에서 무죄를 유죄로 판결하는데 인용하고 있는 '성 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란 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말하며,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해 낼 대안을 찾아내는 능력까지도 포함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아직 개념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없지만, 1995년 '베이징 세계 여성 회의' 이후 유럽연합(EU)과 미국 등 다수 국가에서는, 젠더(gender)를 남녀차별적인 섹스(sex)보다 대등한 남녀 간의 관계를 내포하며 평등에 있어서도 모든 사회적인 동등함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산 편성, 집행 과정에서 남녀에게 미치는 효과를 고려하여 남녀 차별없이 평등하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성 인지 예산제도'를 2008년부터 시행하고 있으나 정착과는 아직도 거리가 있는 듯하다.

'성 인지 감수성'을 인용한 대법원의 횃불과도 같은 판결은 2018년 4월에 있었다.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 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며, 학생을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징계 받은 대학교수가 낸 해임결정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또한, "범행 현장을 침착하게 벗어나기 위해 가해자의 손을 잡은 것이고, 갑자기 성폭행을 당해 황당하고 어이없어 웃었다."는 피해 여성의 말을 받아들여 1심의 무죄와 다르게 2심에서 실형과 함께 법정 구속한 판결도 있었다.

이와 같은 법원의 결정은 관련 사건에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즉, 피해 여성의 특수한 사정을 최대한 살피라는 취지라고 본다.

여성에 대한 차별(가정에서의 역할, 직장에서의 보수나 지위 등)은 부당한 것으로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세계적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의 연구에 따르면 부당한 대우에는 원숭이도 분노한다고 한다.

충북중앙도서관 김규완 관장
김규완 충북중앙도서관장

지난 가을 동산에 올랐다가 애처로운 광경을 목격했었다.

도토리 줍던 할머니가 가랑잎 사이에 모아진 예닐곱 개의 도토리를 발견하고 얼싸 좋다하고 주웠더니, 참나무에서 청솔모가 벼락같이 내려와 팔딱팔딱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렵게 모아서 가랑잎 속에 숨겨놓은 자기의 식량을 눈앞에서 빼앗겼으니 얼마나 분하고 억을했으랴!

앞서 든 작년도 4월의 대법원 판결 이후, '성 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게 최근 판결의 경향이라는 법조계의 분석처럼, 성범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획기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약자의 의사에 반해 꼬드기고 강제하고는, 합리화하고 덮어씌우는 철면피한 강자들에게 철퇴를 가하는 것은 사법에서 의당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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