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송광세 사진작가·시인

토박이로 청주에서 팔십 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생각나는 것 중 전해오는 옛이야기도 기억이 있기에 추억의 샘터로 흘러나온 것을 씁니다.

그 옛날 무심천 변을 생각하면 하얀 모래밭에 여름철 알몸으로 고기도 잡고, 까맣게 탄 몸에 찰흙을 바르고, 도깨비 놀이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심천이란 고유 명사도 참으로 우리 고장 청주의 향기가 넘친다고 봅니다.

헌데 청주의 도시계획은 좀 그렇습니다.

국립현대 미술관이 탄생했기에 행복합니다만 때늦은 제언이지만 지엽적 개조 혹은 건물 확장, 도로 개·보수 방향에 부끄러운 감이 있습니다.

과감한 도로 확충으로 청주의 옛 연초제조창이 문화 공간으로 새로운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데 공용부지를 대각선 도로(뉴욕의 브로드웨이 처럼)로 신설하는 것을 목표로 구역의 전문관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청주 시민으로서 원하는 것은 교육의 도시로, 교육이란 문화의 공간이 정돈된 공동체의 행복 도장이 됐으면 합니다.

이같은 청주의 자랑이라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 지역으로 직지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또한 국내유일의 양각인 용두사지 철당간과 백제 시대의 상당산성 유적도 있습니다.

청주의 관문으로 '무심천 대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겨 봅니다.

사진과 시조가 있는 '꾀꼬리 일기'를 펴낸 송광세 작가./김용수
송광세 작가.

남석교는 고려 말 만든 것으로 읍성 남문을 나와 무심천을 건너던 다리였고, 1936년 땅에 묻힐 때까지 큰 다리 즉 대교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2004년 청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에서 길이가 80.85m로 밝혀져 우리나라 널다리로는 가장 큰 다리로 확인됐습니다.

3층 교각 위에 장판석을 깐 형태로, 지금도 육거리시장 남북쪽 통로 바닥에 온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석교동이 생겼습니다.

무심천 물길은 1906년 대홍수를 겪은 후 여러 차례 제방을 쌓아 지금처럼 바뀌었으며, 석교동 일대를 연결하던 다리는 점차 흙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뜻있는 사람들이 '청주를 세계로'라는 바람으로 석교다리 발굴 운동을 펼치길 기대해 봅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