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 한봉수 의병장
'무적장군', '번개대장' 불렸지만 소탈 검소한 지역의 웃어른
내수의 가난한 농부 아들 출생
사격과 사냥에 자질,,,의병활동에 사형선고도

한봉수 의병장의 지역주민이었던 김동희씨는 "일본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주민들에겐 소탈하고 검소한 지역의 웃어른이었다"라고 한 의병장을 기억했다. /이완종
한봉수 의병장의 지역주민이었던 김동희씨는 "일본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주민들에겐 소탈하고 검소한 지역의 웃어른이었다"라고 한 의병장을 기억했다. /이완종

[중부매일 이완종 기자] "마을 사람들 중 한 의병장님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마을의 대부님 같은 존재였죠."

청암 한봉수(1884~1972) 의병장은 후기 의병에 참전해 연전 연승을 거두며 '무적장군', '번개대장'으로 불리는 등 일제의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 내수읍 세교리 마을 주민들은 그를 의병장이 아닌 소탈하고 검소한 지역의 웃어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말년에 고향에서 사냥 등의 취미를 즐겼고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으며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역주민이었던 김도경(82)씨는 "한봉수 의병장은 일제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이곳 세교리 주민들은 마을의 큰 어른 같았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한봉수 의병장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분이었는데 집안의 경조사 뿐만 아니라 어려움이 있을 경우 마을사람들은 꼭 한 의병장님을 찾았다"며 "마을 사람들이 찾아올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며 자신의 일처럼 자신의 일처럼 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서다보니 주민들은 그를 '한 주사님' 또는 '대부님'이라고 부를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 의병장님이 서거하셨을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슬픔에 빠졌었다"고 덧붙였다.

한봉수 의병장은 1884년 4월 18일 충북 청원군 북일면(현 청주시 내수읍) 세교리 197번지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한진영씨와 경주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격과 사냥에 자질을 보였던 그는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해산군인 출신인 김규환과 함께 의병으로 봉기했다.

이후 진천 문배리 부근에서 일본 헌병중위를 사살하고 강원도에서 내수읍 초정리로 세금을 수송 하는 일본군 호위대를 습격해 3명을 사살해 군자금과 총기를 확보했다. 또 같은해 세교리에서 일본 헌병대와 교전해 12명을 사살하고 옥화대에서 홀로 일본군 헌병 2명을 사살 하는 등 문의, 괴산 청산, 전의, 목천, 평택, 여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렀다.

남대문역에서 일본헌병에게 체포됐고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합방대사령'으로 사면을 받아 석방됐다.

하지만 그의 애국활동을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무렵에 홍명희·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과 수단을 상의한 후 독립 선언서를 몰래 지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같은해 3월 7일 청주 서문장터(우시장)입구의 마차 위에 올라가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사꾼들과 장에 모인 사람들과 함게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한 세교리 구시장에서 주민들을 동원해 만세시위를 벌였고 식목행사를 위해 모인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명과 만세시위를 벌이는 등 애국활동을 펼쳤다.
이에 따라 체포된 한 의병장은 1919년 5월 6일에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이 같은 공훈을 기리며 한봉수 의병장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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