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남북공동연구 분단 허물 마중물 될 것"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박걸순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충북출신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용수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박걸순 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충북출신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용수

[중부매일 김금란 기자]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남북이 통일을 하기 위해 해야 할 중요한 사전작업 중 하나를 역사 공감대 회복"이라고 강조하고 "충북 출신 애국지사인 단재 신채호 공동연구를 통해 학문적 벽을 허물고 통일의 마중물로 삼자"고 제안했다.

박 교수는 "분단 독일은 반나치 저항작가 브레이트의 자료를 모아 동독과 서독이 공동자료를 만들어내면서 통일의 길을 갔다"며 "최근 북한에서 유출된 단재 선생 친필 유고 3편을 분석한 결과 상당 부분 왜곡돼 학문적 동질성 회복과 교류를 촉구할 근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감대를 회복하려면 서로 좁힐 수 있는 분야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남북이 함께 인정하는 독립운동가 신채호, 안중근, 홍범도, 김구 선생 등에 대한 공동작업을 하면서 역사 인식을 좁혀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지자체의 독립유공자 선양사업이 외향적인 행사에 치우쳐 있다"며 "특히 충북은 지역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리도 안돼 있어 충북의 독립운동사 집대성 작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국민들이 쉽게 이해하고 다갈 수 있도록 사실에 근거한 역사의 대중화 작업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중부매일은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박 교수를 만나 독립운동가 연구를 통한 남북 교류 방안과 충북의 독립운동사가 지닌 남다른 의미를 들었다.  /편집자

|박 교수는 "노무현정부 이후 교류가 완전히 끊어지면서 '남북간 역사 인식 경화(硬化)현상'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번 북미2차 정상회담이 큰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교수는 정치·경제 분야에 집중된 교류·협력사업을 역사·문화 분야로 눈을 돌려야 역사적 동질성 회복이 빨라질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같은 역사를 다르게 인식하는 상황에서 통일을 얘기 하는 건 허황된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며 "자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충북도 등 지자체의 외향적으로 치우치는 독립유공자 선양사업에 대한 충고와 함께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 전환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충북도는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약해 관련 사업을 항상 뒷순위로 미룬다. 다른 지자체는 그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다 정리했는데 충북은 독립운동사가 없다. 지역의 독립운동사 집대성 작업과 애국지사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충주시가 몇 해 전 지역 출신 독립유공자 류자명 선생 기념사업을 중국에 있는 선생의 아들(류전희)과 공언했던 사례를 꼽았다. 박 교수는 "그 약속이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선생의 아들이 '왜 그렇게 신의가 없냐'고 항의를 했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일제 강점기 재판 판결문 중 충북자료 3천여 권을 분석해 151명의 지역 독립운동가를 찾아낸 것을 보람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개인으로 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국가보훈처나 독립기념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 지역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발굴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 교수는 애국지사를 알리고 그 분들의 업적을 이으려면 먼저 학술적 정비가 필요하고, 청소년 등 국민들이 친밀하게 느낄 수 있도록 대중화, 일반화 작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국가보훈처가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국민이 좋아하는 애국지사 8위에 박열이 올랐다. 전문가들조차 잘 몰랐던 인물인데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인지도가 신채호(10위)를 뛰어 넘었다. 대중적인 교육이 독립운동가를 인식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뿐만 아니라 앱과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한 온·오프라인 콘텐츠 제작·보급으로 역사는 근엄하고 엄숙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걸순 교수 연구실 문에 걸려 있는 광복군의 서명이 담긴 태극기
박걸순 교수 연구실 문에 걸려 있는 광복군의 서명이 담긴 태극기

충북에서 일어난 첫 3,1 만세시위는 벽초 홍명희 선생이 주도한 3월 19일 괴산 장터시위라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3월 2일과 7일 괴산장날 시위가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고, 한봉수 의병장이 3월 2일 만세 시위를 했다는 생전의 증언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일제기록으로 확인 된 바 없다.

괴산 장터시위는 3월 19일, 24일, 29일 장날 세차례 연속 일어났다. 이후 3월 30일 미원장터, 4월 1일 청원장터 시위가 이어졌으며 4월 19일 제천 송학장터 시위까지 11개월 동안 충북 10개 시·군 전역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박 교수는 역사적으로 더 의미를 갖고 살펴봐야할 애국지사를 소개했다.

우선 청주 강내면 태성리의 횃불시위를 주도한 조동식 선생을 들었다. 태성리 횃불시위는 나라에 병란이나 사변이 있을 때 신호로 올리던 불, '봉화'(烽火)의 개념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역사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시위는 3월 23일, 24일, 26일 3차례 연속해서 일어났다. 불이 지닌 강렬한 속성과 밤에 산에서 외친 독립만세 소리는 상당한 파급력을 보이며 청주 인근은 물론 충남, 강원도로 횃불시위가 번졌다. 횃불시위로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된 조동식 선생은 '왜 산에 올라가서 횃불시위를 했느냐'는 물음에 '봉화고변'(烽火告變)라고 대답했다.

또 일본을 벌벌떨게 했다는 한봉수 의병장은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폄하 하는 일본의 허구적이고 가증스러운 식민사를 분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인물로 주목했다. 

충북지방 후기의병을 대표하는 한봉수 의병장은 1907년 의병활동을 하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지만 1910년 한일합방 당시 회유정책으로 풀려났다. 그 후 일본의 감시 하에 있던 한봉수 의병장은 1919년 4월 1일 식목행사를 하러 나온 보통학교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내수시위를 주도했다. 이는 의병장 출신이 3.1운동 때 다시 등장했다는 점과 의병장이 어린 보통학교 학생들과 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자주독립 의지를 역사적인 맥락으로 실증하는 애국지사다. 

박 교수는 "일본은 3.1운동을 미국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지 니들이 독립 의지가 있었느냐며 폄하했는데 그걸 여지없이 분쇄해주는 게 한봉수 의병장"이라며 "1910년 사형선고를 받았던 분이 9년 후 다시 3.1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강한 자주독립 의지를 역사적으로 실증하는 구체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또한 남과 북에서 유일하게 훈장을 받은 류자명 선생은 분단시대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식민지 시기에 지성으로서 독립운동을 주도 했던 분이다. 또한 중국에서 높게 평가받는 독립운동가로 한중 교류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1918년 모교인 충주간이농업학교(현 충주농업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선생은 제자들을 데리고 3.1운동을 기획했다 사전에 충주경찰서에 탐지돼 그 길로 서울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선생은 3.1운동에 가담한 뒤 상하이로 망명해 해방 된 뒤 한국전쟁 등으로 귀국 시기를 놓쳐 중국 호남농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퇴임했다. 호남대학은 중국 최고의 농업대학이고, 류자명 선생은 중국에서 열손가락안에 꼽히는 농학자로 평가 받는다. 호남대학은 류자명 기념관과 동상을 세웠다. 외국인에게 냉담한 중국에서 선생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오랫동안 류자명 선생을 기록했던 중국의 한 여기자는 '훈장을 단 원예학자'라는 책도 출간했다. 이 책에서 선생의 유명한 일화 '두 개의 달'이 소개 된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노년의 선생은 말련에 배운 고량주를 몇 잔 마시고 창밖의 달을 쳐다보면서 "나에게는 달이 두 개 있다"라고 말한다. 

박 교수는 "두 개의 달은 한국과 중국을 조국으로 생각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 한국과 중국에 있는 두 명의 아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한 표현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류자명 선생이 두 개의 달 이야기를 하면서 노래를 흥얼흥얼 했는데 아리랑 이었다. 선생은 유해로 고국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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