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충청취재본부장

1508년 12월 25일. 조선 중종 즉위 3年이 지난 때다. 중종은 예고 없이 승정원(왕이 내리는 교서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글 등 모든 문서를, 왕의 출납을 관장하는 행정기관)과 예문관(왕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해 짓는 일을 담당하는 관서) 승지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느닷없는 호출에 긴장감을 떨칠 수 없었다. 드디어 중종은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허물 듣기를 좋아하는 임금이 적고, 허물 듣기를 싫어하는 임금은 많았다. 임금의 허물을 과감하게 간하여 임금이 그 허물을 고치면 그 신하를 직신(直臣), 임금의 잘못을 간하지 않고 아첨을 일삼는 신하를 유신(諛臣)이라 했다"

이어 중국 당나라 명군 가운데 하나인 태종(太宗, 李世民)의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 당 태종은 겉으로는 직언과 충고를 받아들이는 도량이 있었다. 그러나 참덕(慙德, 당 태종이 등극 전 형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을 죽인 일)이 있어 내(중종) 이를 취하지 않는다. 임금의 과실이 있다면 외정(外庭, 궁궐 밖)의 신하들도 다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하물며 후설(喉舌, 조선 시대 왕명의 출납과 나라의 중대한 언론을 담당한 승지, 승정원과 예문관 관련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중종)의 득실을 그대들은 각각 숨김없이 말하다 비록 지나친 말이 있다 해도 죄를 묻지 않겠다."

중종은 말이 끝나자 준비해두었던 먹 20 홀과 붓 40 자루를 승지들에게 각각 나누어줬다. "이 붓과 먹으로 모든 나(중종)의 과실을 숨김없이 얼마든지 쓰도록 해라"

승정원 승지들은 생뚱맞은 붓과 먹을 하사(下賜)받고 다소 당황했지만 이내 분부대로 하겠다고 아뢨다. 임금의 명령이니 무조건 따른다는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받아들여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허물 듣기를 즐겨함과 싫어함은 치란(治亂)에 관계되는 것이다. 신하가 과감하게 간하는 것과 아첨을 올림은 그릇됨과 올바름을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신 등은 전지(傳旨, 王命書)를 받드오니 감격스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상의(上意, 임금의 마음)에 맞도록 하겠습니다."

당황하기는 예문관 승지도 마찬가지였다. 뜻하지 않는 임금의 행동에 감격, 극구 임금을 찬양하며 분부대로 하겠다고 아뢨다.

"신 등이 성지(聖旨)를 받드니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항상 사관(史官)이 나의 과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시고, 경계 근신하시어 치평(治平)을 도모하시면 우리 동방 사직(社稷)의 복이 되겠습니다."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충청취재본부장

중종이 당 태종을 거론한 데는 그의 신하 위징(魏徵)과 연관이 있다. 당 태종은 등극 전 반대편에 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위징을 신하로 삼아 명군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징의 쓴소리를 철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람(지적·쓴소리)을 거울삼아 정치를 했던 위징을 태종 역시 그 위징을 거울삼아 정치를 펼쳤다. 특히 태종은 위징의 거센 쓴소리에 칼을 들었다 멈추기도 했다.

중종이 붓과 먹을 하사(下賜)한 것은 어떤 쓴소리도 받아들일 아량이 있고. 승정원과 예문관 승지들이 선뜻 붓과 먹을 받은 것은 거침없이 쓴소리를 하겠다는 의미다. 지부상소(持斧上疏)처럼 말이다. 붓 40자루와 먹 20홀. 이것이 다 닳도록 사용할 경우 쓴소리의 양이 얼마나 될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 정치사는 쓴소리가 부족해 굴곡이 심하다. 정치 권력자는 절대 붓과 먹을 주지 않는다. 추종자들은 줘도 사용하지 않는다. 정치 권력자는 물고기에 떡밥을 주는 낚시꾼이며, 추종자들은 물고기가 널름 받아먹은 떡밥이 아닐까? 그저 유신, 이른바 딸랑이다. 이러니 나라꼴이 이 지경이 아닌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