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일 칼럼]

세태(世態) 가 바뀌다보니 이제는 1월 졸업식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 학교 졸업식에서, 그것도 오래도록 추억의 장으로 새겨질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중 하나는 졸업생의 교가 제창(齊唱)일 것이다. 학교마다 상황이 다르고, 학생마다 감회가 제각각이니 모두가 같을 수 없겠지만 교가(校歌)는 그렇게 학교에 대한 기억의 한조각으로 졸업생의 뇌리에 남게 된다. 세월이 꽤 흐른 어느 날 모교의 교가를 부를 기회를 맞게 되면, 평소에는 기억속 존재의 여부조차 희미했던 그 노래가 입 언저리를 맴돌다 그 시절을 소환(召還)하는 경험을 겪기도 한다.

올해 개교 99주년을 맞은 광주제일고등학교는 전라도를 대표하는 명문고로 1929년 항일투쟁의 한 장을 장식한 학생독립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같은 학교가 올 졸업식에서 교가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곳에서 개교이래 처음 이같은 일이 벌어진 까닭은 이 학교 교가의 작곡자가 친일인사 이흥렬이기 때문이다. 항일 학교라는 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학교에서 친일 작곡자가 만든 교가는 안된다는 생각에 학생과 학부모가 공감해 이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전국 여러 곳의 학교현장에서는 친일청산 교가 교체가 진행되고 있다. 광주뿐 아니라 충북에서도 친일인사가 만든 도내 초·중·고교 교가 실태를 조사해 이를 교체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469개 학교 가운데 초 2, 중 11, 고 13 등 총 26개 학교의 교가가 작사가 이은상, 작곡가 김동진·김성태·이흥렬·현제명 등 친일인사의 작품인 것으로 확인됐다. 인근 충남에서는 31개 학교가, 서울에서는 113개 학교가 같은 처지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항일정신을 드높이고, 친일의 상흔을 지우는 일에 앞장서야 할 학교 교가가 친일인사 작품이라면 정비하는 것은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 교가의 또 다른 주인공이랄 수 있는 졸업생들은 찾아 볼 수 없다. 교가(校歌)는 그 학교의 교육 정신·이상·특성 등을 나타내는 노래로 학교의 정체성과 비전을 표현하며 보통 학교의 지리적 환경, 학생들이 성장한 지역적 특성을 담고 있다. 그런 만큼 학생들의 학창시절과 떼려야 뗄 수 없고, 졸업생들에겐 아련한 추억의 창구같은 역할을 하곤 한다. 따라서 이를 교체하는 일이라면 재학생 만큼이나 졸업생들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들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최동일 부국장겸 음성·괴산주재
최동일 논설실장

우리 사회 곳곳에 아직도 수없이 남은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일은 중요하고 서둘러야 할 일이다. 친일인사가 만든 교가가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사회의 친일잔재는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같은 친일잔재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공론화하는 작업이 먼저일 것이다. 당장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어떻게 해야 하나. 친일을 넘어 '친나치 행보' 의혹이 불거진 만큼 국가(國歌)의 자격을 고민해야 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 인적잔재는 무조건 지울 것인가, 교육적으로 다룰 것인가. 따지고 챙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3·1운동 100년을 맞은 오늘, 친일잔재에 얼룩졌더라도 우리가 걸어온 길이라면 우리의 역사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스로의 기준을 먼저 세우고 이 모든 것을 바로 잡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광복 70년이 넘도록 뒷전으로 미뤄뒀다가 3·1절 과거를 되새기자는 분위기에 편승해 보여주기식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일들을 명명백백 밝히고, 역사적·사회적 잣대에 맞춰 당사자들이 결정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 80%가 '친일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라도 국민의 공감대속에 하나씩이라도 청산작업을 해야 옳지 않겠는가.

키워드

#최동일칼럼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