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강의시간을 맞추느라 버스에서 내려 서두르는데 말쑥하게 차린 중년을 지난 숙녀가 명함을 내보이며 길을 묻는다.

"썬 플라워 웨딩 컨벤션, 저 건너 큰 건물 노란색 벽에 영어로 쓴 하늘색 간판 보이세요?", "영어를 모르는 까막눈이예요.", "제가 그쪽으로 가니까 같이 가시지요." 숙녀의 솔직한 고백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녀가 "할아버지, 오늘 버카충하게 용돈 좀 주세요, 네?"라는 말에 "뭐한다고?" "버스카드 충전한다고요." 옆에서 그 말을 들은 할머니가 "말 좀 알아듣게 해라.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잖아." "할머니는 제발 낄끼빠빠하세요, 네?" "난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 경로당에나 가봐야겠다." 줄임말 세대와 까막눈과의 고답한 대화다.

'솔까말 오늘 아침 출근길에 개재수 없게 갑톡튀 애를 쳐서 처리하느라 지각 했어.' / 식당 출입문에 붙어있는 광고지, '브런치 손님, Take out 손님, 개환영' / 영화관에서 나오는 이들이 "이 영화 오나전 핵노잼(核no잼)이다." / "김샘, 사르바이트 할 데 없어요?"

20~30대에서나 소통되던 줄임말이 이젠 모든 연령대의 일상용어가 되었다. 별다줄이란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으니 줄임말을 모르면 농아(입 닫고)나 장님(눈 감고)과 청각장애인(귀 막고)으로 살 수밖에.

한국적의 갑질이 세계화의 'gapjil'이 되더니 미투(Me, Too.)에 이어 지난해에 출시된(新造語) 소확행(小確幸), 싫존주의, 화이트 불편러, 가심비, 워라밸(work-life-balance), 졌잘싸 등이 간지작살, 병맛, 와파, 귀척, 흠좀무, 아라, 벤츠남, 여병추, 이뭐병, 같은 줄임말이나 속·은어와 함께 세대 구분 않고 드나드는데, 솔선 수범해야할 공영방송에서도 무시로 흘러나온다.

10대들의 인싸와 아싸에서 그들도 이해 못하는 롬곡옾높, 이생망, 할많하않, 무찐, 컬크러시, 빼박캔트, 갑분싸, 법블레스유, 행복회로 등과 많이 알려진 커엽다, 좋못사, 제곧내, 전차스, 우유남, 엄근진, 사바사, 복세편살, 마상, 렬루(real루), 댕댕이, 누울보, 나이리지 등도 키 재기하며 나온 꾸밈말들이다.

경제사정이 좋지 못해 살아가기 힘들다는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말이지만 그런 말까지 이해하고 살자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장년이나 노년층에서는 이미 언맹(言盲)이 되어 외래어보다도 더 모르는 우리말이 되었으니 백성들이 쓰기 편하도록 만들었다는 한글창제의 취지가 무색하다.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한 세기 전 어머니의 세대는 말은 잘 하면서도 그것을 읽거나 쓸 줄을 모르는 문맹(文盲)이 대부분이었으나 그래도 외국어가 아니면 못 알아듣는 말이 없었으니 소통의 불편은 전혀 없었다. 약자가 다수였음이다.

이제 노년이 청년세대를 기웃거리려 해도 말과 글이 외계인 것처럼 들려 세대 간이 저절로 격리되니 제도나 교육의 힘을 빌어서라도 소통체제를 이룩해야할 상황이다.

눈 뜬 장님의 까막눈으로 이 혼란스런 세상 적응하려니 철지나 나이 든 어지럼증도 아니면서 갈 곳 잃은 말과 글 속에서 방향 키 부러진 세월위에 앉아 설 곳마저 잃어 정체성 찾으려니 서민 시민 대중 민중 백성 국민의 흑백과 홍청도 구별 못해 보이지도 않는 미세먼지에 휩싸여 그냥 흘러만 간다. 이래도 되는 건가? 바르고 고운 우리말 쓰기에 함께 노력할 것을 정중히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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