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시간, 청주시내 인문계 고등학교 앞은 자녀들을 데리러 부모들이 몰고 온 차량으로 혼잡을 이루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파김치가 되어 나오는 자녀들을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부모의 마음 또한 편할 리 없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혹시 노벨상이라도 나오려나? 아니다, 목적은 오직 원하는 대학의 진학에 있다.

지난 주말에 고등학교 1학년생이 스스로를 ‘저주받은 89년생’이라 하며, 내신성적 강화에 의한 대입선발에 대항해 촛불집회를 시도하였다.

내신을 위해서라면 우정 따윈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이제 고등학생도 촛불 공화국의 일원이 된 것 같다.

그렇다면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대학의 현실은 어떠한가.

벌써 대학들은 신입생 유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에 들어가고 있다.

일부 대학의 교수들은 강의를 상당부분 포기하고 오직 학생유치를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것도 우수학생의 유치가 아니라, 입학정원을 채우기 위해서이다.

분명 교수가 아니라 영업사원이 된 것이다. 어느 고등학교 앞에 ‘대학교수와 잡상인 출입금지’라고 쓰여 있다는 것이 오늘날 대학의 현실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정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도대체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일부 한정된 대학은 목숨과도 바꿀 듯이 학생이 몰리고 있고, 여타의 대학은 학생이 오지 않아 존립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극단적이고 다면적인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를 이루고 있다.

1996년 대학의 인가에 준칙주의가 도입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당시 대학설립을 인가한 당국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혹시 대학간의 무한경쟁을 통하여 교육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킬 것으로 생각했다면 엄청난 착각을 한 것이다.

지금 수도권과 대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학 교수는 학생유치에 분주하여 자신의 연구에 몰두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대학교수는 전문직 종사자이다. 전문직은 자신의 전공에 심도있는 지식과 식견을 갖추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봄철부터 학생유치에 분주한 교수들은 자신의 전공을 심화할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해서 유치한 학생에게 얼마나 준비된 교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더구나 업적평가라는 부담이 교육과 연구 뿐 아니라 산학협동, 사회봉사 등 만능 슈퍼맨을 요구하고 있다. 즉 교육이라는 교수본연의 업무는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은 내버려두면 ‘보이지 않는 손’에 해결되는 고전주의적 경제개념이 아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영리를 목적으로 공장의 원재료를 가공하여 이익을 붙여 파는 제품생산의 개념이 아니다.

학생들은 교육학 서적에 나오는 교육기법의 실험용 몰몬트가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교육정책은 분명 조심스럽지 못했다.

사실 교육전문가들이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으면 경제관료가 교육계의 수장이 되었을까.

지금 이 시점에서 필자는 당장 어떠한 정책을 펴자는 것이 아니다. 교육정책의 입안과 실행에 보다 신중을 기하자는 것이다. 마치 매년 세법 바뀌듯 조령모개(朝令暮改)식의 교육정책이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매년 이러한 지적이 제기되고 있지만, 교육정책의 의사 결정자들은 거시적으로 뜻을 모으고 좀더 심사숙고하는데 소홀한 것 같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여간해선 교육정책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칫 한번의 교육정책 실패가 당사자의 피해 뿐 아니라, 국가의 미래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우리나라 경제는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꼬집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금 그 분께 한 번 묻고 싶다. “지금 교육은 몇 류 입니까?”

/충청대 경영학부장 윤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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