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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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를 매다가 멈칫한다. 순간 헛웃음을 지으며 넥타이를 서랍 속에 도로 넣는다. 습관이란 이리도 무서운 것일까. 갈 곳도 없는데 몸이 반응하며 빠르게 움직인다. 한동안 습관처럼 행하던 일과가 몸에 밴 탓이다. 강산이 네 번 바뀐 세월 동안 젖은 행동이 어찌 쉬이 변하랴. 이제 발을 동동거리며 넥타이를 맬 필요가 없지 않은가. 지금부터 39년간 지속한 시간으로부터 자유의 몸이다.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니 영혼이 자유롭다. 영혼이 자유로우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이 듦은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일이라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어떤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는가 보다. 심신이 허전하다. 머리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데 행동이 따르지 못한다. 아직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이 마음도 서서히 익숙해지리라.

오랫동안 몸담았던 정든 교단을 뒤로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지만, 현실은 엄연히 오갈 데 없는 무직자이다. 스스로 정체성이 여전히 혼란스럽다. 질긴 인연의 끈을 내려놓는다는 게 어디 쉬우랴. 청순한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이 환청으로 다가온다. 금방이라도 달려와 환한 미소로 인사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하얀 분필 가루가 날리던 청색 칠판 위에 지나온 세월의 추억들이 그려진다. 이십 대 청춘의 젊은이가 반백의 머리를 한 초로의 모습으로 스쳐 지나간다.

혼돈의 시절 1980년 교직에 입문하였다. 희망이 봄물처럼 넘치고 자신감이 충만하던 시기였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 무언지도 모른 채,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정 하나만으로 교단에 섰다. 연륜이 짧아 노련미는 없지만 순수했고 정의를 주장하며 영혼이 맑았던 때였다. 아이들과 함께 밝은 미래를 꿈꾸며 노래하고 춤췄고, 가난을 이겨내며 멋진 미래를 설계하자고 외쳤다. 모두가 형편이 어려워 시대의 아픔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다독이던 시절이었다.

돌아보니 그 시절엔 나름의 낭만이 있던 시기였다. 사제 간의 훈훈한 정이 흐르고, 박봉의 교직 생활을 천직이라 여기며 가르쳤다. 역경을 극복하고 배움만이 살길이라고 다그치며 살았던 시기가 아닌가. 그 시절은 요즘처럼 '선생'이라는 자부심과 자존감이 폭우로 담장 무너지듯 하던 시대는 정녕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었고,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를 넘어 학생들에게 인생의 좌표를 열어주는 스승으로서 자부심이 충만한 시절이었다.

가르친다는 건 자신을 깨우치는 일이다. 세월이 흐르고 연륜이 쌓이며 가르친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깨닫는다. 미욱한 사람이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과 생활하며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랴. 사려 깊지 못한 행동과 부족한 실력으로 학생들을 기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다.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한 일이라고 항변하지만 되묻는 답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기 한이 없다.

후배 선생님들과 조촐한 퇴임식을 겸한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후배라고는 하나 사시사철을 함께 호흡하며 교단에 섰던 동지들이다. 어느 때보다 교직이 힘든 시기에 잘 나가신다고 부러움 섞인 위로와 축하의 말을 건넨다. 그래도 아이들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내 말이 왠지 공허하게 느껴진다. 무언으로 통하는 눈빛에 교직에 대한 현실의 벽이 서려 마음이 아리다. 지금은 힘든 시기지만 그네들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감싸며 교육의 불씨를 지피리라. 학교와 교육도, 스승과 제자도 굽이치며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말없이 모든 걸 품고 유유히 흘러가리라.

나의 퇴임 소식에 수많은 지인과 제자들이 축하 인사와 꽃다발을 보내온다. 과연 축하를 받아도 되는지 반문하지만 보람된 삶이었지 싶다. 청출어람의 의미가 실감이 나는 제자들의 모습이 대견하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불쑥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네들을 보면 가슴이 뿌듯하고 흐뭇하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제자들이 자랑스럽다. 내 삶이 결코 헛된 삶이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시간이라는 추상명사가 주는 구속력은 대단하다. 시간에는 숫자가 뒤따르기에 더욱더 그런지도 모른다. 39년의 직장 생활을 마감하니 56년간 굴레를 쓴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칫 나태함을 잉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태함도 삶의 연속성 안에 깃든 것이기에 즐기련다. 틀 안의 삶이 아닌 자유로움을 만끽한 삶도 의미가 있지 않으랴.

새로운 인생 2막의 시작이다. 이제 백수 생활 보름째이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는 모른다. 마음껏 영혼의 자유로움을 즐기며 살고 싶다.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적어 여행을 떠나련다. 그간 게으름 피운 문학 공부도 실컷 하고, 흙내음 맡으며 뜨락의 꽃향기를 전하리라. 시간에 얽매여 하지 못한 일들을 한둘씩 접하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

 

강전섭 수필가
강전섭 수필가

약력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우암수필문학회,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부회장
▶한국문학세계화추진위원회 충청지부장
▶청주문화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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