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장영주 국학원 상임고문·화가

3월은 3.1절과 임시정부의 수호자 석오 이동녕 선생,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이 걸쳐 있다.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곁을 끝까지 지킨 동지가 있었다. 충북 제천 출신의 우덕순으로 그는 '노우키에프스크'에서 안중근·김기열 등과 함께 손가락을 끊어 결사보국을 다짐하고 히로부미 처단에 동참한다. 천재일우의 막중한 사명을 반드시 성공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채가구 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두 겹으로 거사하기로 정밀하게 전략을 짜고 숙의한다.

첫 번째, 먼저 이토 히로부미를 쏘고,

두 번째, 쏘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를 것.

세 번째, 될 수 있는 대로 생포되어서 억울한 사정을 외국에 선전할 것 등을 결의한다.

결국,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 파괴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에 성공한다. 그런 뒤 재판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통렬한 언변으로 전 세계에 전하고 꼭 5개월 후인 다음해 3월 26일 순국하신다. 아직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 중이었고, 일제는 그 원고가 완성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할 것을 약속했던 터이었다. 일제는 왜 하필이면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인 26일에 형을 집행하였을까? 그날 중국 요녕성의 여순형무소 사형 집행실에서 안중근(安重根)께서 유언하신다.

"내가 행한 행동은 오로지 동양평화를 도모하려는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바라건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들도 나의 변변치 못한 충정을 잘 헤아려, 너와 나 구별없이 마음을 모으고 협력해서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야흐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는 적군들에게 마지막으로 '너나 없는 참된 동양평화'를 이루라고 남은 목숨의 분과 초를 살려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얼마나 겸손하고, 얼마나 호방하며, 얼마나 간절한 인품인가. 백범 김구 역시 평생을 이런 기백과 신념으로 일관하였다.

1894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동학군 토벌 대장인 안중근의 아버지 진사 '안태훈'과 적이 된 동학의 애기접주 '김구'는 바야흐로 생사를 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열아홉 살의 젊은 동학대장 김구의 사람됨을 알아본 안태훈은 밀사를 보내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맺는다. 쫓기는 김구를 안태훈은 자신의 집에 피신시킨다. 안태훈의 장남이 바로 '안중근'으로 김구보다는 3살 연하이었다. 안태훈은 가훈을 '정의'라고 정했고 맏아들인 안중근은 자연히 그 바른 정신이 날래고 용감한 몸에 배었을 것이다. 14년 뒤, 하얼빈 역에서 덩치 큰 러시아 군인들 사이로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움직이는, 얼굴도 모르는 적장을 정확하게 저격한 안중근의 예지력과 사격술은 이미 어릴 때부터 몸에 익혀져 있었던 것이다.

장영주 국악원 상임고문·화가
장영주 국악원 상임고문·화가

이렇게 영웅들의 의로운 숨결로 겨우겨우 지켜온 나라가 어느새 K-POP으로 지구를 휩쓸고 아시아, 중동, 남미, 아프리카까지 한류의 영향으로 음악, 영화, 음식, 화장품까지 날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한글을 사용하는 인구는 8천만 명으로 세계 13대 언어가 되더니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하려는 말도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온다. '대한민국은 인구 2천만 명이 넘는 나라 가운데 제국주의를 채택하지 않고도 선진국이 된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외국인 학자도 있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도모하여 목숨을 걸고 성공한 사람은 이봉창. 윤봉길 처럼 의사(義士)라고 한다. 그러나 유관순처럼 애석하게도 성공하지 못한 분은 열사(烈士)라고 한다. 그런 구분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의사와 열사의 마음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곧 나라를 지켜내신 영웅들과 이름 없는 분들의 숨결과 마음을 바르게 전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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