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김현진 청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학창시절 제일 힘든 수업시간은 미술이었다. 어쩜 그리 감각이 없는지 미술 수업에서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다. 내 그림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던 미술 선생님의 모습만 눈에 선하다. 마음의 상처는 훗날 내가 그린 뽀로로를 보고 웃던 아이의 얼굴에 치유 받았다. 그렇게 미술은 내게 미지의 영역이 되었고 굳이 알아야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닮은 거라고는 동그란 안경 모양뿐이었던 내 그림에 환히 웃는 아이의 얼굴에 행복했으니까.

내게 예술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논할 때 나는 예술적 공간 보다 분양가를 따졌고, 피카소의 그림보다는 해바라기 그림을 집에 걸면 부자가 된다더라는 말을 더 믿었다.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고 여전히 이 생각은 나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전공도 한몫했다. 사회복지학 자체가 실용주의적 학문 성격을 가지기에 여러 분야의 협업이 필요하지만 주로 '먹고 사는' 기초생활과 관련된 영역이기에 문화나 예술은 늘 후순위였다.

그래서 굳이 필요치 않다 느껴왔는데 비교적 기초생활이 보장되는 요즘은 나와 우리 이웃이 좀 더 '잘'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복지와 문화를 함께 생각하게 된 계기, 그러니까 실용적인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나와는 다른 세계의 것인 줄 알았으나 '쓰임'이 있으면 그건 그대로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닐까.

책으로도 안 되던 나의 문화적 소양이 간단한 생각 바꾸기로 갑자기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다. 여전히 '그들'만의 대화라고 느껴지지만 이젠 그 대화가 두렵지 않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음악을 좋아하는 지인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마음을 모아 수년째 음악회를 연다. 내가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끌어갈 수 있는가. 재미있는 그의 대답. 노는 데도 돈이 드니 이왕 쓰는 돈 좋아하는 일에 쓰고자 한 것이란다. 노는 일에 음악을 보태 기획한 하우스 콘서트가 지금은 매달 100여 명이 넘는 청중들에게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고 지역 음악 인재들을 위한 무대가 되어 그들의 포트폴리오를 채워주고 있다. 늘 적자지만 그렇게 그렇게 5년이 흘러 음악인들에게 알음알음 소문 난 무대가 되고 있다.

취미로 콘서트를 연다는 건 음악만 좋아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들의 노력이 여전히 유지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순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년쯤 지나면 이리저리 지원을 받으려 하거나 받고 싶은 욕심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노력으로 음악을 즐기러 온 이들의 참가비만으로 매월 넷째 주 목요일 그 콘서트를 이어간다. 오래전부터 콘서트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걸음을 하지 못했다. 내 무지가 탄로날까 주눅이 들어서. 그런데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음악도 미술도 그냥 느끼면 되는 게 아닐까. 좋으면 좋은 데로, 싫으면 싫은 데로 말이다.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사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건 "실용적 목적에 맞지 않는 것은 절대 아름다울 수 없다"고 주장한 건축가 오토 바그너의 말 때문이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심과 깊은 동의. 간소하고 실용적인 그의 건축 양식은 예술적 의미를 지닌다. 그의 말처럼 실용이 아름다운 예술이 된 것이다. 미술관에서 만난 이 글귀가 내가 '아는' 미술과 내가 '즐기는' 미술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문화와 예술은 생각보다 가깝게 있다. 이 둘은 다르다 하겠지만 아직 내 수준은 그것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저 내 눈에 보이는, 내가 경험한 것들이 문화이며 예술일 수 있다는 생각. 그래서 지나온 옛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지금의 것에서 미래 세대에게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 것 인가보다. 미술을 몰라도 미술관에 가보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술처럼 미술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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