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선수 모델로 한 작품 '소년'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이다. 청주가 낳은 조각가 김복진(1901~1940)은 우리나라 최초의 조각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였다. 나이 마흔에 병사한 그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최근 우리 지역 출신뿐 아니라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이 되고 있는 가운데 근대 조각의 선구자였던 김복진의 삶과 작품 세계와 김복진 이후의 청주 조각에 대해 정창훈 조각가를 통해 3회에 걸쳐 알아보고자 한다. / 편집자

Ⅰ. 정관(井觀) 김복진의 '소년'

조각가 김복진은 1940년 조선미전에 손기정 선수를 모델로 한 '소년'을 발표한다.

소년, 김복진 作


'우리 대한(大韓)으로 해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라 하면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리라'

윗글은 소년의 첫소리이다. 대한매일신보와 신민회에 의해 신문관이라는 출판사를 세워 '소년' 잡지로 발간, 젊은이들을 깨우쳤고, 또한 이것은 '소년' 잡지 창간 취지문으로서 애국정신, 용기, 신지식, 세계적 시야를 소년들에게 불어 넣어 민족적 개명을 꾀하려는 것이었으며 독립운동의 모체인 신민회에 의해 거세게 일어난 계몽운동의 일환이었다.

조각가 김복진, 그는 어떤 사람인가?

1901년 4월 3일 영동·황간 군수를 지낸 김홍규의 장남으로 청주 남이 팔봉리에서 출생한다. 둘째가 1903년생 소설가 팔봉 김기진이다. 김복진은 팔봉리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황간보통학교, 영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6년 배재고보에 입학했고, 1919년 3월 배재고보학생으로 3.1운동에 참여해 홍보물 제작·배포 혐의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1920년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 1922년 도쿄에서 연극단체 토월회를 조직했고, 1925년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고국으로 돌아와 배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그해 6월 제4회 미전 인상기를 발표, 7월 토함산 석굴암 본존상 스케치를 시대일보에 발표한다.

1926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인 '카프'를 중심으로 강령을 만들고 책임지도자가 돼 예술을 통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카프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즈음에 '조선역사 그대로의 반영인 조선미술의 윤곽'을 개벽에 발표한다.

1927년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망라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창립(회장 이상재)회원으로 활동한다.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주도적인 카프 활동 등)으로 5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했다.

1935년 2월 출소 후, 조선중앙일보 문화부장으로 취임해 많은 예술관련 칼럼과 비평을 쓴다. 1938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경성제대 병원에서 사망하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제자들과 함께 안창호 데드마스크를 만들다 일제에 연행돼 고초를 치른다.

조각가 정관 김복진은 1936년 8월 13일 신문사 문화부장으로 재직중이던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올림픽 우승기사에서 일장기를 말살하는 사건으로 강제 폐간됨에 따라 신문사를 떠나게 된다. 그 후 작품에만 몰입했고,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소년'이 탄생한다. 신문사에서는 일장기를 말살했고, 조각에서는 일장기를 입은 윗옷을 벗어 버리게 한 손기정으로 미래를 응시하며 굳은 의지로 서 있는 '대한', '조선'의 독립된 나라의 소년을 조각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조선 독립의 뜨거운 열망을 가슴에 품은 채 청주용화사 칠불 보수, 법주사 미륵대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오랜 수감생활 후유증과 창작 열정이 겹쳐 1940년 8월 18일 40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정창훈 조각가

3·1운동 100주년의 해, "모험은 청춘이며, 청춘은 곧 생명이다"라고 한 김복진과 그의 '소년'을 오늘의 '우리'로, 세계 속의 '나'로 보아야 하겠다. 우리 청주가 낳은 예술가, 독립운동가 김복진 바로보기를 해보자. / 정창훈 조각가 (전 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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