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봄이다. 매화와 목련이 피고 머잖아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울긋불긋 산천과 도시를 물들일 것이다. 봄은 꽃의 계절이다. 김춘수의 시 '꽃'이 이에 어울릴 듯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이 싯귀를 품은 그 시는 아름답다고 칭송되며 널리 알려져 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언어의 옷을 입히는 것. 그것이 없다면 의미 발생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그저 애매모호하고 막연한 에너지 덩어리로 삼라만상이 변별되지 않고 느껴질 것이다. 느낌이란 것 자체가 언어의 인지 능력이 개입되기에 언어가 없는 즉물적 상태에 대해 인간은 거의 알 수가 없다.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는 칸트의 절망도 그와 멀지 않다. 바로 그런 면에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사랑을 느끼는 순간엔 그에 맞는 이름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시적 감정이 사르르 피어오른다. 그로 인해 색다른 조응이 둘 사이에 일어나면서 새로운 정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김춘수의 '꽃'은 이러한 사유를 품은채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다른 생각도 지니고 있다. '당신이 뭔데?'하는 불끈함이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이름을 불러줘야만 꽃이 되는가.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가. 당신이 부르든 말든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있는 것이다. 언어의 옷을 입기 이전에 이미 원래 고유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감각이 깔린 반발이다.

이런 길로 나아가면 또다른 세계가 풍요롭게 펼쳐진다. 하이데거의 존재와도 만날 수 있다. 싸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마로니에 나무 뿌리가 뿜는 낯선 이질감의 향연과도 조우가 가능하다.

사물들은 원래 이름이 없다.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언어 이전의 상태가 사물과 우주의 본질이다. 언어를 통한 여행이 멋지지만 언어 이전의 세계를 향한 무언의 여행도 숭고한 깊음을 지닌다. 선불교의 선이나 명상의 바다가 그윽하게 찰랑일 것이다.

이름 내지 언어에 대한 이런 양면성을 볼 때 김춘수의 '꽃'은 언어 이전의 면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자유이며 나의 이런 딴지를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김춘수의 '꽃'에 대해 혹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입체성이 흐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우리나라는 시에 대한 이해가 너무 약하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 문제일 것이다. SNS의 발전 등으로 모든 사람들이 시인인 듯 되어 있다. 실제로 사람들의 본성은 시에 가깝다. 그런데도 시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는 점에서 부조리가 느껴지며 슬픔이 인다. 이 문제는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본질적으로 시인인 인간들이 왜 시에 약한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과 같다. 실제로 현실 세계는 자아에 대해 잘 모르도록, 알까봐 두려워 마비와 질식을 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한 집단들에 의해서 말이다. 한 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문명 구조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보이지 않는 폭력의 기제들을 잘 살펴서 자신의 모습, 자아와 우주의 대화에 보다 집중하는 길은 언제라도 현명하지만 지금 시대엔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봄 향기가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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