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며칠 전 비가 내렸다. 모처럼 내려선지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소리도 참 좋았다.

비가 멈춘 다음날 우리집 골목엔 작은 싹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미리 돋았던 싹들은 부쩍 키가 자랐다.

내가 사는 골목집은 우리집이 첫 집이고 네 집이 모여 산다. 골목 입구엔 우리가 심은 큰 뽕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계단을 조금 밟고 올라가면 앵두나무와 얼마 전 경희네가 심은 포도나무가 있다. 더 가면 감나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큰 나무가 있다. 아쉬운 것은 몇 년 전 담장 공사로 인해 향이 좋았던 수수꽃다리가 베어진 것이다. 살짝 오르막인 골목 바닥은 꽃밭이 있는 데만 빼만 나머지는 보도블록으로 되어 있다. 촘촘하거나 반듯하지 않고 낮게 울퉁불퉁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보도블록 틈사이로 봄이면 민들레와 냉이꽃 등 작은 풀꽃들이 많이 핀다. 이사 와 첫봄을 맞을 때였다. 윗집 경석이네 할머니가 보도블록 사이에 뾰족뾰족 돋아난 풀을 뽑고 있었다.

사실 난 그 연둣빛 여린 풀들이 정말 좋았다. 그래서 잘 자랐으면 했다. 할머니는 풀 뽑는 김에 우리집 앞 풀도 뽑아주신다고 했다. 골목 끝에 사는 '만두'라는 별명을 가진 아주머니도 골목을 오가며 풀을 뽑아주었다. 그래서 한 날은 안 되겠다 싶어 말씀드렸다.

"저…, 우리집 풀은 뽑지 마세요."

"아, 괜찮아요. 젊은 사람들은 바빠서 시간도 없을 텐데."

"그런 것이 아니라… 저희는 풀을 기르고 있어요."

정말 그랬다. 나는 노란 주전자나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보도블록 사이 풀들에게 주었다. 특히 비가 안 오면 빠짐없이 물을 챙겨 주었다. 물론 사람이 잘 지나가는 중간 부분에 자란 풀들은 뽑아냈다. 대신 담 옆으로 난 풀들에겐 정성껏 물을 주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보도블록 사이사이를 녹색 선으로 쭉 그어 놓은 것 같았다.

내가 풀을 기른다는 것은 금세 골목에 소문이 났고 덕분에 우리집 골목 풀들은 맘껏 자랄 수 있었다. 길고양이도 눈치를 챘는지 풀을 망치지 않고 스륵스륵 잘 피해 다녔다.

한번은 무더위가 심한 날이었다. 풀들도 그걸 아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해가 지기시작 할 때 큰 주전자에 물을 받아 흠뻑 주었다. 그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꼿꼿하게 일어났다.

그래도 연세가 많은 경석이네 할머니는 아주 가끔 우리집 앞 풀을 뽑아주었다. 풀을 기르는 게 이해가 안 간다며. 아마도 내가 게으르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경석이네는 닭을 길렀다. 그러다 닭이 탈출해 옆집으로 또 골목으로 나왔다. 닭이 얼마나 크고 튼튼한지 동화책에서 본 쌈닭 같았다. 우리가 옆에 가면 도망가기는커녕 덤빌 자세를 취했다.

몇 년 전 경석이네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경석이네는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 이후 봄이 오면 경석이네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던 모습이 그립다. 그리고 경석이네 할머니가 우리 집 앞 풀을 뽑을까봐 가슴 졸이던 생각에 살짝 웃음도 난다.

왁자지껄했던 골목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집 골목길에는 풀꽃과 앵두꽃, 감꽃 등이 필 것이다.

그럼 난 버릇처럼 휴대폰으로 노란 민들레꽃부터 찰칵찰칵, 주변 사람들에게 봄소식을 전할 것이다.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우리집 골목길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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