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난영 수필가

어린 시절 몸이 약해 제 나이에 초등학교 입학을 못 했다. 엄마는 들로 일하러 나가시고 오빠들과 친구들이 학교 가고 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가지고 놀 장난감은 없었고, 혼자서는 소꿉놀이나 어떤 놀이도 재미없었다. 자연스레 호기심은 산과 들에 피고 지는 꽃으로 향했다.

시골의 봄을 알리는 개나리와 진달래부터 찔레꽃, 국화와 망초, 민들레가 여린 마음을 달래주었다. 잎이 넓어 시원하게 느껴지던 파초는 보기만 해도 힘이 솟았다. 봉숭아 꽃물 들이려고 온 가족이 둘러앉았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정겹다.

꽃에 대한 호기심은 청주여고에 입학하면서 애착으로 다가왔다. 청명원엔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이 즐비했다. 교무실 앞엔 수십 년 된 자목련과 백목련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양지바른 화단에는 팬지, 데이지 등 키 작은 꽃들이 앙증맞게 피었다. 멋스럽게 생긴 고사목에 둥지를 튼 능소화는 화려한 미소로 교정을 밝히고, 기이하게 생긴 소나무와 향나무가 위용을 자랑했다. 연못에는 고운 자태의 수련이 피는 등 시골 촌뜨기에겐 별천지였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교정은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게 하였고, 졸업 후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는 영광까지 주었다.

꽃에 대한 애정인지 철이 없는 것인지 신혼 초 셋방살이하면서도 꽃을 사들였다. 곁에서 보는 남편은 한심했겠지만, 꽃을 아끼고 좋아하다 보니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었다.

7남매의 맏이는 모든 걸 다 안아야 했다.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시동생들 뒷바라지, 어머님의 오랜 병간호 등 운명으로 알고 열심히 챙기다 보면 지쳐 쓰러진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곳이 꽃집이었다. 예쁜 꽃들과 눈 맞춤하고, 식구로 하나 맞아들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고 힘이 났다. 꽃은 삶에 찌든 내 마음을 정화시켜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게 하였고, 공직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 하는데 일조했다.

매년 찾아오던 꽃샘추위도 없이 봄이 성큼 다가왔다. 목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단비를 머금은 수선화, 튤립, 크로커스가 꼬물꼬물 하나 둘 세상 밖으로 나온다. 앙상한 가지를 배회하며 방랑자처럼 외롭던 겨울바람은 자취를 감추고, 포근한 봄바람에 미선나무, 앵두나무, 서부해당화가 꽃망울을 키운다. 복과 장수를 뜻하며, 봄의 전령으로 통하는 복수초가 수줍게 노란 꽃망울을 터트려 꽃말처럼 행복을 준다.

죽은 듯 땅속에 묻혀 있던 생명체들이 꽁꽁 언 땅을 뚫고 나오는 강인한 생명력에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활짝 피어난다. 특히 튤립을 보고는 기쁨이 일렁였다. 그동안 화단에서 월동했으나, 땅이 푸서리 해서인지 간신히 꽃을 피우고 힘없이 스러졌다. 튤립이나 무스카리는 여름에 캐어 놓았다가 11월 초에 다시 심어야 다음 해에 튼실하고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다는데 무지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정성스레 캐어 양파 자루에 담아 지하실에 고이 저장했다. 장마 때 지하실에 물이 찼었으나 천장 가까이 걸어놓았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11월 초에 심으려고 보니 구근이 작아진 데다 그나마 몇 알 남지도 않았다. 남편 일찍 사별하고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정작 어머니 당신은 남루한 빈 거푸집만 남기고 돌아가신 친정엄마 마지막 모습 같아 아릿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빈 쭉정이 같은 작은 구근을 화단 곳곳에 심었다. 봄이 되니 여기저기서 살짝 고개를 들고나오는 제법 통통한 싹이 보인다. 기쁨의 탄성에 무뚝뚝한 남편마저 미소 짓는다.

꽃은 마음을 부자로 삶을 꽃길로 인도하지 않았나 싶다. 영예로운 정년퇴직 후, 집 가까운 꽃이 있는 텃밭 꽃 뜨락에서 꽃을 가꾸며, 자연을 벗 삼아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으니. 꽃 뜨락은 도심 속이지만, 정원의 배롱나무에 새가 둥지를 틀 정도로 시골 같은 풍경이다. 자연이 주는 금빛 햇살,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을 마음껏 누리는 행복 뉘 알까.

식물의 꽃뿐만 아니라 가슴속에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정년퇴직 후 바로 자원봉사를 시작하려 했으나 뜻하지 않게 다리를 다쳐 주춤했다. 아쉬운 대로 손뜨개 봉사, 배 봉지 씌우기 등 이것저것 해보았으나 감당하기 힘들었다. 지난해부터 공무원 퇴직자들이 풍선아트 상록자원봉사대를 조직하고, 요양원과 노인주간 보호센터에 정기적으로 자원봉사를 한다. 풍선으로 꽃도 만들어 주고, 달팽이 모자도 만들어 주는 등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몸은 고달파도 행복을 듬뿍 담아오는지 웃음꽃을 활짝 피운다.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 수필가

작은 정원이지만, 초봄부터 시작해서 가을까지 홍화산사, 백도화, 서부해당화, 오데마리, 러브화와이 등 저마다의 매력을 지닌 꽃들이 미의 경쟁을 벌이듯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보면 볼수록 기쁨과 행복을 주는 꽃,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연일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데도 정원에서 풀 뽑고 화분 분갈이하느라 분주하다. 퇴직하고 나니 힘은 들어도 매일 갈 곳이 있고,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란 생각이 든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꽃 사랑! 내 삶을 곱고 고운 무지갯빛으로 물들이고 있으니 이게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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