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어릴 적 여름방학 때 외갓집 가느라고 기차에서 내려 들판을 지나 땀을 뻘뻘 흘리며 꼬불꼬불한 산길을 걸어서 십리고개를 넘어 골짜기로 내려가는데, 바닥까지 깨끗하게 보이는 계곡물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목도 축이고 더위도 식힐 겸해서 두 손을 모아 계곡물 한 움큼을 받아 마시는데, 그 시원함과 달콤함이란 말로는 무어라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것도 풀지 않은 땡볕숲속의 맹물 맛이 어쩌면 그렇게 달수가 있을까. 갑자(甲子)가 한 번 지났어도 그 물맛을 잊을 수가 없다.

맹물에 대한 느낌이나 추억이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공통된 정서는 순수와 청결, 투명과 결백, 희망과 이상, 미래와 가능성, 그리고 약속과 실천이라고 한다. 맹물은 모든 물의 근원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그 끝도 맹물로 마무리되기에 긍정의 좋은 말들이 다 붙여진 것 같다.

맹물에 무엇인가가 첨가되면 금방 본래의 성질이 바뀌거나 상실되어 순수성을 잃어 사용하는 이들의 성격까지도 변화시켜 동질성 회복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한다. 숨 있는 사람이 자연의 맹물만 먹어도 아주 오래 살 수 있는 이유이리라.

밥맛과 국 맛, 장맛과 술맛, 김장 맛에 심지어는 고향과 타향의 흙냄새까지도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 맛을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서로 다르니 맹물의 효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맹물이 체내에 들어온 초미세먼지도 골라서 밖으로 내보낸다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풍토병이 맹물을 잘못 다스린 죄 값이라면 너무 헐할지 모르지만, 구미 맞추느라 맹물에 조미료 섞어 입맛 버려 고생하지 말기를 바란다.

전장에 나간 가족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매일 새벽에 옹달샘의 맑은 맹물을 길어다 부뚜막에 올려놓고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정화수, 찢어지게 가난한 처녀총각의 백년가약 맺어주던 소반위의 찬물 한 그릇, 조상님의 넋을 기리는 날에 식후에 올리는 갱 물, 허기진 배 불려주던 샘물, 소풍가는 아이의 가방에 엄마가 넣어주는 물병 속의 맑은 물, 모든 식사의 대미를 알리는 순서도 꼭 물이 차지한다.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김전원 충북인실련 상임대표

사람을 고르는데 쓸 만한 인재가 없을 땐 맹물 같은 재목을 고르면 손재가 없다고 한다. 추진력과 카리스마가 없어 무능해보이고, 학지혈연의 인맥도 희박하며, 사용해본 적이 없는 동아줄은 삭아서 실낱만도 못하지만, 만고풍상의 시련과 대박경험 일천해도 굳은 심지만 지키며, 손에 쥔 게 없으니 추종자도 없어도, 주변의 간섭 떨치고 위기 헤쳐 나갈 이는 그래도 맹물밖에 없더란다.

입맛 맞춰 양념 조합하니 저작하는 이(齒)부터 영양 선별 뒤 남은 재료 배설까지가 조미료 조화로 상하는 곳 천지라 장마에 제방 터지듯 하니 가래로도 막지 못해 신열에 몸부림치다 제풀에 쓰러진다. 자승자박인가?

임종을 맞은 이의 마지막 소원이 맹물 한 모금 마셔보는 것이라기에 한술 떠 입속에 넣어줘도 아끼고 아끼느라 넘기질 못하니 그게 정말로 소중하긴 소중한가 보다. 그것도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맹물이라니 한번쯤 되돌아볼 수밖에. 길가다 갈증 날 때 송사리 헤엄치는 도랑물 떠서 벌떡벌떡 마시던 때가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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