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은 '면 단위 중심' 만세운동 전개가 특징"
일본 기록에 '미연에 방지된 시위 22건' 주목
수한면 묘서리 권양하 씨 일기도 소개 '눈길'

8일 오후 3시 보은문화원에서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시군 순회 학술대회'에서 국사편찬위원회 김대길 박사가 '보은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의의'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 송창희
8일 오후 3시 보은문화원에서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시군 순회 학술대회'에서 국사편찬위원회 김대길 박사가 '보은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의의'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 송창희

[중부매일 송창희 기자]  "보은지역의 3·1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달리 보은읍이 아닌 면 단위 중심으로 전개됐다는 점과 일본 측 자료에 '미연에 방지된 시위'로 기록한 22건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충북도가 주최하고 보은문화원·충북학연구소가 주관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시군 순회 학술대회'가 8일 오후 3시 보은문화원에서 열린 가운데 국사편찬위원회 김대길 박사는 '보은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의의'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김 박사는 "'매일신보'에 실린 충북도내 괴산, 청주, 옥천, 영동 등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세시위운동 소식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보은군에도 전파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구체적으로 전달됐을 것으로 보인다"며 보은군에서 가장 먼저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1919년 4월 2일 산외면 어온·이식리라고 밝혔다. 이어 4월 3일 산외면 이식리에서 약 100여명의 군중이, 4일과 7일 회남면과 회북면 일대에서, 8일 내북면에서, 11일 탄부면과 산외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됐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김 박사는 보은지역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기록돼 있는 시위미연방지 기록 22건이라고 강조하고, 이것이 준비단계에서 탐지돼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것인지, 시위운동이 전개됐지만 곧바로 해산당하거나 진압돼 무산된 것으로 기록됐는지에 대한 재검토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보은군 수한면 묘서리에 거주하던 권양하 씨가 남긴 일기가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권 씨가 작성한 일기는 2권이 남아 있으며 1909년 12월 3일부터 1924년 12월 24일까지 적성한 것으로, 날씨와 기후, 농사, 절기, 시장 출입, 서울 왕래 내용, 학동교육 내용, 풍습, 당시의 교통과 사회 변화상 등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날 종합토론에 참여한 김양식 충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3·1운동의 가치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던 보은지역의 3·1운동이 가지는 특별한 장소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한 오늘 발표된 일기 등 자료 발굴, 구술 채록, 유공자 발굴이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진수 보은문화원 이사는 "보은지역의 3·1만세운동은 손병희 선생과 접촉했던 윤정훈 선생을 비롯 천도교와 관련돼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보은은 1894년 12월 동학농민혁명 북실전투로 인해 일본의 심한 감시대상 지역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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