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시인 신동엽 50주기를 기념하며
저항시인 신동엽 50주기를 기념하며
  • 중부매일
  • 승인 2019.04.10 15: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신동엽 시인은 김수영, 신동문, 한용운, 심훈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6·25 전쟁 당시 부여군인민위원회 선전선동부에 속해 활동을 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위원회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가던 중 대열에서 이탈한 사실이 알려져 지난 시절 이념 시비로 '신동엽 전집'은 1975년 간행됐지만 두 달도 못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판매금지 조치 당했고 긴급조치가 풀린 1980년 증보판을 냈지만 다시 판금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동엽과 청년 시절 문학동인을 함께한 경찰 출신 인사 '노문'이 작성한 '석림(石林) 신동엽 실전(失傳) 연보'에 따르면, 신동엽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빨치산도 아니다. 그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니힐리스트였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신동엽문학관 사무국장인 김형수 시인은 서구의 이성적 합리주의를 넘어서는 신동엽의 사유를 동학 정신과 연결해 논의하고 있다.

아무튼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신동엽 시인의 대표시인 '산애 언덕에'가 1989년 중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리고, 50주기 행사를 문화체육관광부와 대산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등 가히 '신동엽 르네상스'라 이를 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7일은 신동엽(申東曄, 1930~1969) 시인 타계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신동엽 시인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나 전주 사범, 단국대 사학과,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보령 주산농고, 서울 명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되어 등단했다. 1963년에 시집 '아사녀(阿斯女)'를, 1967년에는 서사시 '금강(錦江)'을 발표했다.

그는 일평생 주로 향리인 부여에 살면서 시를 쓰다가 운명하여 '금강(錦江)의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소년시절의 황국신민이었던 그는 해방 이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을 역사의 질곡을 넘어서 가장 낭만적인 현실주의자로 성장했다. 그런데 한국전쟁과 군사독재, 외세의 침입을 몸소 체험하면서 가난과 부자유로 고통을 겪게 되자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주눅 들면서 저항시인이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항시는 '껍데기는 가라'이다. 신동엽 시인이 1967년 1월에 신구문화사가 간행한 '현대문학전집' 제18권으로 기획된 '52인 시집'을 통해 발표한 이 시는 김수영의 '풀잎', 신동문의 '아! 신화 같은 다비데 군들'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저항시로 알려져 있다.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동학년 곰 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그리하여, 다시/껍데기는 가라/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가/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 할지니//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특히 이 시는 우리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여러 의미 있는 사건들을 바라보던 화자가 허위적인 것(껍데기)이나 겉치레는 사라지고, 순수한 마음과 순결함만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민중들의 공감을 많이 얻고 있는 1960년대 참여문학의 대표작이다.

신동엽 시인은 역사적 질곡에서 주로 역사적 소재를 중심으로 민족의 수난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킨 작품을 썼다. 대개 장시의 형태로 토착정서에 역사의식을 담은 민족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재해석과 비판, 민족의 운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맑은 감성, 은유, 고운 언어로 표현되어 미의식과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신동엽은 신동문과 같이 4·19 혁명에 대하여 남다른 집념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힐 수 있었던 것도 4·19 정신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