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봄이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을 살고 있는 터라 요일 따위는 잊고 살지만, 이 봄이란 계절은 굳이 인식하려 들지 않아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미세먼지니 뭐니 하여 공기가 지저분해졌다고 시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역시 봄인가 보다.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법원에 이르는 길을 가는 사람들의 복장이 한결 가볍다. 대부분 사연이 있어 재판을 받으러 가는 사람들일 터인데도 멀리서 봐도 옷매무세가 겨울에 비해 가벼워 보여 그들을 바라보는 필자의 마음 또한 괜시리 가벼워진다.

평소 세상시름 혼자 다 겪은 듯 이마 한가운데 깊은 도끼자국 같은 고뇌의 주름살을 가지고 사는 필자지만 요즈음 창밖에 펼쳐지고 있는 엉망진창에 가깝도록 아름다운 봄의 기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창밖의 봄의 향연에서 눈을 뗄 수 없음을 고백한다.

황홀하게 흐드러지는 형광색 벚꽃, 폭포처럼 비탈에 쏟아지는 노란 개나리, 봄밤에 홀로 빛나는 하얀 목련, 그 사이에 비치는 달빛같이 아름다운 것들은 누군가에 대한 애틋함을 담아 시를 쓰기엔 매우 적절한 자극이 될 것이지만, 누군가를 위해 공격적인 서면을 써내려가야 하는 변호사들에게는 그런 봄의 아름다움은 무용(無用)을 넘어 예리한 서면을 생산하는데 엄청난 훼방꾼이 된다.

더욱이 법원의 휴정기를 지나 법원과 검찰의 인사이동으로 어수선해서 변호사로선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던 1,2월이 지나서야 봄이 찾아온다. 변호사에게 있어서 봄에 솟아나는 것은 파릇파릇한 새싹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철렁하게 만드는 재판도 그러하다. 군대 제대를 앞두고 있는 병장에게 기다리는 것은 민간인으로서의 자유뿐만 아니라 냉정한 사회생활도 함께라는 애매모호한 기분같다고 할까?

봄이 되면 연초에 지지부진했던 재판기일이 하나둘 잡히기 시작하면서 잠시 숨죽였던 분쟁이 움을 트는 시기이기에 느슨해진 긴장감을 바짝 당겨야 하는 시기이다. 칠렐레 팔렐레 봄바람 따라 제맘대로 들썩이는 마음을 애써 추스려야 하니 봄이 주는 아름다움은 변호사라는 직업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얄미운 것이기도 하다.

고백하건대, 평범한 인간으로서 봄을 누리고픈 마음을 직업인의 진지한 표정으로 짐짓 감추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왠지 봄에 쓴 서면에는 낭만의 감정이 묻어있다. 하지만 예리한 법논리는 잃지 않았으니 봄의 서면은 '아름다운 칼같은 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봄의 재판에는 격조와 낭만이 있다.

어쩌면 봄의 무용해 보이는 아름다움은 일년 대부분의 나날을 긴장과 치열함 속에 내던져져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뜻밖의 변신기회라는 생각을 해본다. 봄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사람을 홀려 길을 잃게 만드는 것에도 나를 바르게 인도하는 신의 섭리가 숨겨져 있으리라는 신앙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소년시절 불성실했던 필자가 갑자기 공부에 뜻을 세운 때도 목련꽃 핀 어느 봄날의 밤이었다. 멀쩡한 대학을 그만두고 삼수생의 길을 택하게 된 것도, 잘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그만 두고 백수가 되어본 어느 봄날의 선택도 어쩌면 누군가의 눈에는 길을 잃은 모습이었을 것이고, 봄의 엉망진창같은 아름다움에 취해 어이없는 실수를 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봄의 아름다움에 취해 빠져나갈 램프를 놓쳐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시골길의 이름모를 꽃들을 결코 보지 못하여 그 아름다움을 끝내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봄에 취해 실수한 것으로 표현될 이야기가 필자에게는 더 큰 가치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고는 하였다. 봄의 신은 나의 편임이 분명하다.

봄의 무용해 보이는 온갖 아름다움에 나를 맡긴 덕에 지금의 필자가 있다. 오늘은 길을 돌아 떨어지는 벚꽃잎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갈까 한다. 차안에 꽃잎 몇송이 떨어진들 무슨 큰일 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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