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최근배 전 충주시의회 의원

'그날/불끈 쥔 주먹이 하늘을 두드려/세상을 깨웠지/일어나라 정의여/민주주의여/거친 함성소리 흩어진 허공에서/역사를 찾아 데려오느라/반백년이 걸렸다/군중들 무심히 오가는 길 위에서/잠시 머뭇거리며 물었다/넌 그때의 함성을 기억하니….'

충주의 이덕자 시인은 '충주 4·19 학생혁명기념탑 앞에 서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었다.

59년전인 1960년 3월10일은 대구의 2월28일. 대전의 3월8일에 이어 전국에서 3번째로 충주의 학생들이 독재정권에 항의하여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위로 4·19 민주혁명의 도화선을 일으킨 위대한 날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일보가 '충주학생들 데모, 학교에서의 여당의원 강연에 불만' 제목에 3단크기로 보도한데 이어 동아일보 3월25일자에 '충주, 수원서도 시위. 경찰 제지 10여명 연행'이라는 제목으로 역시 3단기사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충주발(忠州發) 기사로 '이곳에서도 학생 데모가 발생하였다 10일 하오 1시경 충주고등학교 학생 300여명이 교문앞에서부터 데모를 시작하여 학원에 자유를 달라고 외치면서 시가를 행진하였는데 경찰의 제지로 시위대열은 해산되고 10여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고 실었다.

조선일보 역시 충주발 기사로 '10일 하오 충주시내에서는 300여명의 충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와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면서 데모를 하다가 경찰의 저지로 해산된후 약 2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그중 4명만 남고 나머지는 곧 석방되었다'고 보도했다.

이날은 학기말고사 날이었는데 학교측이 갑자기 시험을 연기하고 대신 이곳 출신 자유당 소속 홍병각의원의 시국강연을 들어야한다며 600명의 재학생을 강당에 모아 이승만대통령 이기붕부통령 후보의 지지연설회나 다름없는 강연을 듣게했던 것이다.

마침 전날 박순천여사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의 거리유세를 목격했던 학생들은 너무도 뻔한 홍의원의 강연에 술렁이자 당시 윤한상 학생회장과 대의원등 60여명의 학생들이 강연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어 다시 강연장으로 들어가 "집어치워라" 소리지르고 퇴장하며 "학생을 정치도구로 사용하지 말라. 민주주의의 쟁취"등의 구호를 외치고 시내 중심가를 향하여 전교생의 절반인 300여명이 제2로터리로 행진하던중 경찰의 곤봉 세례로 해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충주농고(현 국원고) 학생들도 학교에서 나와 시내에 진입하려 했지만 봉방교와 삼원초교 뒤쪽 철길에서 저지를 당하고 돌아와 독재정권 물러나라는 가마니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충주여고는 2월5일과 10일경에 이정자 학생회장 중심으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쪽지를 장날 나눠주다가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지만 충고의 데모를 뒤늦게 안데다 경찰의 제지로 많은 학생이 참여치 못했다.

최근배 전 충주시의회 의원
최근배 전 충주시의회 의원

대낮의 데모가 경찰의 저지로 해산되자 학생들은 야간데모를 강행키로 의견을 모으고 오후 8시 당시 아시아극장 근처와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 집결키로 했다 사실상의 시내 고교연합 시위로 약 300여명의 학생이 모여 중앙시장과 제1로터리로 진출할 무렵 경찰의 기습으로 끝이 났다.

이렇게 펼쳐졌던 충주의 4·19학생혁명은 55여년이 지나도록 자칫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뻔 했으나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는 것이어서 마침내 조혁연기자에 의해 이 사실이 밝혀지자 충주시민들은 추진위를 구성, 지난해 9천700여만원의 성금을 모아 용산공원에 기념탐을 세우고 올해 59주년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죽음을 각오하며 구국일념으로 사일구(死一球) 혁명의 햇불을 전국 3번째로 들어올린 충주 4·19학생혁명이라는 자랑스런 역사적 진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물론 세세토록 모두의 가슴에 새겨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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