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에 새긴 상형문자… 그 시대 정서·가치를 담다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지금까지 이런 서예전은 없었다. 이것은 서예작품인가 미술작품인가!

신철우(47) 작가의 전시를 본 사람들은 모두가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진천종박물관 기획초대전으로 신철우 작가의 '웅혼'이 오는 5월 19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한지에 그린 그림인 듯 종이의 결은 그대로 살아있지만 그림이 아니다. 용뉴와 연곽, 연뢰의 올록볼록한 윤곽이 입체적으로 살아있다. 그 옆에 새겨진 불상까지. 신 작가는 작품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표현함으로써 당시의 정서와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풍토를 작품에 고스란히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빗살무늬 토기에 담긴 상형문자, 또 그것과 함께 적힌 글씨. 어떻게 보면 잘 쓴 것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서체, 금방이라도 되살아나 맑은 청동음이 울릴 것 같은 신라 동종. 그의 작품에는 현 시대의 형식으로 그 시대의 가치를 담아내고 있다.

문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신 작가는 초등학교때부터 서예를 써왔다. 당시에는 '그냥, 막연히' 글씨를 써왔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 글씨를 썼다. '서예 쓰는 애'로 불릴만큼 글씨를 잘 썼고 대학도 서예 전공으로 진학하면서 서예에 대한 확고한 개념이 세워졌다.

"글씨를 잘 쓰고 못 쓰고가 아니라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글씨를 썼는가가 중요하죠. 대학 3~4학년때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왜 이렇게 글씨를 썼을까?라고요."

서예가는 마음속에 되새길 수 있는 좋은 글을 전달해주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신 작가는 이미지를 통해 느끼고 글을 보고 쉽게 이해하고 깨닫게 해주고 싶었단다.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에 협회활동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는 학교 때 배웠던 글씨와 자료들을 직접 중국에 가서 원서를 찾고 중국 사람들이 서예를 쓰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싶어 29세의 나이에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남들이 모두 가는 북경이나 항주가 아닌 신 작가가 관심있었던 유물과 원서를 찾기 위해 당나라 수도였던 서안으로 떠났던 것이다. 길진 않았지만 중국에서의 원서와 유물 공부는 신 작가에게 큰 변화를 줬다. 중국의 젊은 작가들이 서예에 대해 갖는 자부심, 미래에 대한 기대를 보며 에너지가 충만했었다. 그때의 공부가 신 작가의 자유롭고 예측불가능한 창작의 작품을 가능하게 했다.

지금도 중국 예술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신간 서적이나 자료를 구하러 매년 중국으로 잠깐씩이라도 다녀오는 것이 그에게는 일상이 됐다.

"사람들에게 형식이 아닌 가치를 알려주고 싶어요. 서예가 가지고 있는 가치, 지혜, 현대인이 놓치고 있는 부분, 서예의 진정성 있는 교육 컨텐츠를 체계적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현재 청주문화원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는 신 작가. 그는 유행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조금 힘들어도 전통이 배경이 되는 것은 더디더라도 생명력이 길 수 있고, 그것이 지역문화가 될 수 있겠다는 나름의 의식이 있었고 그가 배워온 것이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전통을 바탕으로 지역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들이 삼아 청주에서 멀지 않은 진천으로 달려가 시대에 맞는 재료를 가지고 한가지 색이지만 농도와 표현에 따라, 안으로 흡수하는 깊은 맛으로 먹빛이 갖는 매력을 표현한 신라 범종과 옛것이 현대에 주는 정취를 느껴보기를 권유한다.

 

이은희 수필가에 비친 신철우 작가

21세기 벽광나치오를 만나다

이은희 수필가

봄볕이 따스한 날 나들이하듯 우촌의 작업장을 찾아든다. 돌을 깨는 도구와 한지가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린 것이 작업 중인가 보다. 일반 서예가의 작업 공간과는 아주 다르다. 그는 여느 서예가처럼 붓으로 글씨만 쓰는 서예가가 아니다. 작품에서 느낀 신철우 서예가는 만능 엔터테이너다. 희끗거리는 반백의 머리칼과 눈물 머금은 황소처럼 커다란 눈, 성우처럼 울림이 있는 목소리.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첫인상처럼, 그에겐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벽(癖)광(狂)나(懶)치(痴)오(傲)'이다. 안대회 교수는 조선을 뒤흔든 전문가이자 예술가들을 '벽광나치오'라고 부른다. 조선 18세기에 한 가지 일에 미쳐 최고가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화가, 무용가, 조각가, 책장수 등 그 시대의 내로라하는 문화 인물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가 잘할 수 있고, 잘하고 싶은 분야에 몰두하여 드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18세기 문화 인물 중 '책에 미친 바보' 책밖에 몰라 '간서치'라고 불린 이덕무가 존재한다. 그는 살림이 너무 어려워 한서를 이불로 삼고, 논어로 겨울 찬바람을 맞고자 병풍으로 삼은 선인이다. 서책이 귀한 시절이라 새로운 책을 읽고 싶어 필사를 마다치 않았고, 열 손가락에 동상이 걸려 시퍼렇게 퉁퉁 부어올라도 그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정조가 그의 잠재한 능력을 알고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할 정도이다.

예술은 가난과 고독을 견뎌야만 하는 극한직업이다. 우촌도 서예가 밥이 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절망과 포기를 모르고 작업을 이어간다. 21세기 신철우도 이덕무처럼 한 가지 일에 미쳐 서예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문화 인물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서울대규장각 유물복원 작업에 필사를 담당하고,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 정부미술은행에 그의 이름을 당당히 올렸겠는가. 소재의 다양화를 추구하며 전통의 결을 이은 무던한 노력의 결과이다.

그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남다른 서예로 나아가는 예술가이다. 추사의 글씨가 어려서 늙을 때까지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듯, 우촌의 글씨도 열 살부터 지금까지 남에게 구속받지 않고 본뜨는 경우가 다시없다. 추사의 남다른 글씨를 보고 '괴기한 글씨'라고 주위 사람들이 조롱하였듯, 우촌의 독특한 글씨를 보고 왜 그리 삐뚤거리느냐고 말한다. 추사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는 서예가'라고 한다. 우촌 또한, 오래된 문화유산을 떠나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숨결은 전통문화 소재로 새로운 작품을 낳고, 작업을 통하여 스스로 서예가임을 재확인한다.

그를 부르는 이명이 많다. 서예가, 한국화가, 도예가, 한지 작가, 조각가 등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그의 작품들을 톺아보면 알 수 있다. 흙을 매만지고 불을 다루며, 한 치의 오차 없이 돌을 깨 문자를 만들고, 한지의 물성을 잘 알아 작품에 접목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그 이면의 결을 아울러 온몸의 감각을 깨워 작품에 몰입한다. 작품은 뭇사람의 감성을 울리는 소재와 글씨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예를 모르는 사람도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자연을 만난 듯 편안해지리라.

그는 분명 서예가이다. 세상은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다 원점으로,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인가. 선사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질그릇 토기를 빚어 그 아래 탁본을 뜬 것처럼 검은 바탕(먹물이 스민)에 흰 문자 밭을 이룬 작품〈회귀(回歸)〉이다. 참으로 신선하고 낯선 작품이다. 이번에 전시된〈침묵의 역사〉란 작품도 발상이 독특한 대작이다. 한지 위에 범종의 형상과 문양을 도드라지게 새겨, 상대에 방랑시인 김삿갓 시(詩)를 우촌만의 고졸한 글씨체로 새겨 넣은 것이다. 그가 낳은 범종이 울리면, 상대에 적힌 문자들이 일제히 살아나 뭇사람의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으리라. 무엇보다 그가 다루는 흙과 한지, 돌 쉽지 않은 소재들이다. 그것들의 속성을 알고자 전문가를 찾아가 배우고 익힌 혼신의 노력과 무수한 시간, 무한 열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랴.

참신한 작품을 낳은 창조 정신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그가 태어난 고향의 음덕이리라. 산수 수려한 대청호 너머 산골에서 태어나 순박함을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어서다. 그리운 고향의 흙내와 유년 시절의 추억, 서예가의 순수정신이 깃들어 있음이다. 무엇보다 마음 놓고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한 착한 아내 덕분이다. 험난한 예술가의 길을 믿고 따라 준 지극한 사랑과 응원의 힘이다. 부디 그가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음양으로 살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1세기 '벽광나치오', 그의 작품이 세상을 구원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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