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수꾼 - 신규식 형제와 그의 가족

고향에 조성된 신규식의 초혼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다 보면 문중이나 가족 단위로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사례를 발견하곤 한다. 문중이나 가족이 해외로 망명해 모두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적 양상으로 평가된다. 문중 단위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표적 지역은 경북 안동으로, 석주 이상룡 등이 문중 차원에서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충북에도 가족 단위로 독립운동을 펼친 사례가 적지 않다. 그 가운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가족이 있다. 곧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출신의 신규식·건식 형제 가족이 그 주인공이다.

신규식과 신건식 생가 터(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신규식은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를 졸업하고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도중에 잠시 귀향해 문동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나, 1903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진위대와 시위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고향에서 의병을 계획했다가 여의치 않자 음독 자결을 기도, 오른쪽 눈의 시신경을 다쳤다. 그가 '흘겨본다'는 의미의 '예관(?觀)'이라고 스스로 호를 지은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현재 몇 장 남아있는 그의 사진에 검은 색안경을 끼고 있는 것은 흰자위만 보이는 흉한 오른쪽 눈을 가리고자 한 것이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신해혁명에 참가하며 중국의 혁명지사들과 친교를 쌓았다. 1912년에는 박은식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해 상하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개척했고,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정부 조직의 필요성을 선구적으로 역설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여건이 그리 좋지 않던 상하이에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그는 쑨원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인정받는 외교적 결실을 거두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22년 9월, 분열로 인해 무정부 상태에 빠진 임시정부의 혼란을 비통해 하며 순국했다.

상하이 망명시기의 신규식(오른쪽, 왼쪽이 신채호)

신건식은 형을 따라 1911년 상하이로 망명했고, 항저우에 있는 저장성 성립(省立) 의약전문학교에 입학, 의학을 공부했다. 이는 후일 그가 중국군 의무장교로 활동하는 기반이 됐는데, 학업을 마치고 상하이에서 형을 도와 독립운동을 펼쳤다. 당시 그는 임시정부의 특명으로 국내에 밀파됐다가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초를 겪었으나, 재차 중국 망명에 성공했다. 형 규식이 순국한 이후에는 중국군 의무장교로 활동하며 그 급료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건식은 1937년부터 중국군 생활을 청산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해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1943년 재무부 차장으로 선임됐는데, 사위인 박영준이 재무부 이재과장을 맡아 장인과 사위가 임시정부 재정을 꾸리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신창희(1906~1990, 일명 신명호, 2018년 건국포장)는 가덕에서 신규식과 조정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고향에서 어머니와 생활하다가 1920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해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으로 활동하던 아버지를 보좌하던 민필호(1963년 독립장)와 혼인했다. 그녀는 1921년경부터 부군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했고, 1943년부터 해방 때까지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그녀의 사위는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해방 후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준엽(1990년 애국장)으로, 혼인으로 형성된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가라 할 수 있다.

신건식, 오건해 부부와 신순호<br>
신건식, 오건해 부부와 신순호

신건식의 처 오건해(1894~1963, 2017년 애족장)는 청주 인근 보성오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남편 신건식도 가족을 두고 망명했는데, 1926년 오건해가 상하이로 건너가 가족이 재회했다.

그녀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아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드는데 정성을 다했다. 사위 박영준(1977년 독립장)은 자서전에서 장모를 "독립운동가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은 오건해 여사는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보낸 분"으로 회고했다. 특히 그녀는 1938년 5월 6일, 김구가 창사에서 총격을 당해 사경을 헤맨 이른바 '남목청사건' 때 김구를 지극하게 봉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건해의 공적은 단지 임시정부 요인의 뒷바라지에만 그치지 않았다. 1940년 6월 17일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자 이에 참가했고, 1942년부터 한국독립당원으로 활동했다.

신순호(1922~2009, 1990년 애국장)는 1922년 가덕에서 신건식과 오건해의 딸로 출생했다. 그녀가 중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중국 친구들은 그녀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그녀가 워낙 말이 없기도 했으나, 만일 '망국노'란 사실이 알려지면 중국 친구들에게 놀림 받을까봐 일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호는 임시정부가 류저우에 머물던 시기,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몸담기 시작했다. 이 공작대는 노태준을 단장으로 중국인을 상대로 선전물 배포와 연극공연 등을 펼쳐 우의를 다지고 독립운동을 홍보하고자 한 청년 단체였다. 훗날 남편이 된 박영준과 공작대에서 함께 활동하며 가까운 사이가 됐다. 이후 순호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군되자 여군으로 입대해 총사령부에서 근무했고, 1942년에는 부친을 도와 임시정부에서 회계 업무를 맡았다.

신순호와 박영준의 결혼식
신순호와 박영준의 결혼식

신순호와 박영준의 결혼식은 1943년 12월 12일 임시정부 청사의 대례당에서 열렸다. 당시 충칭에 거주하던 한인은 4백여 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결혼식장은 백범 김구를 비롯한 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박찬익은 평소 입던 군복을 깨끗이 빨아 입고 입장했고, 신순호는 중국식 치파오를 새로 맞춰 입고 입장해 갈채를 받았다. 결혼식은 외무부장 조소앙의 주례로 진행됐다. 결혼증서에는 김구가 주례로 되어 있으나, 김구는 자신의 삶이 순탄치 않다고 주례를 잘 서지 않았다고 한다.

신순호·박영준 부부는 동지로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부친 신건식과 시부 박찬익이 한인 동포의 귀국 문제를 중국과 외교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난징에 설치한 주화대표단의 임무를 맡았고, 남편도 그 업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모와 시부, 남편과 함께 난징에서 독립운동의 마지막 단계인 교민의 귀국 문제 업무를 담당하다가, 1948년 4월에야 귀국했다.

신규식과 그의 가족은 임시정부를 이끌고 지켜온 대표적인 파수꾼이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독립운동사는 물론 고향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신건식 체포기(동아일보 1921.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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