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누구에게나 붙들고 싶은 기억과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있다. 세월이 흘러흘러 우리는 인생의 어느 계절쯤 걸어가고 있을까?

미리 연락받기는 사모님은 국하고 밥, 그리고 장소만 제공하라는 애교스런 명령과 함께 남편의 제자들이 우리 집을 찾았다. 양손 가득 한 보따리씩 들고 온 아줌마부대가 가지고온 먹거리로 한 상 가득하게 차리니 산해진미가 따로 없다. 정성껏 준비한 카네이션 꽃바구니와 함께 문학소녀였던 제자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들 마음속 영원한 선생님! 삼십년이 훨씬 지난 오래 묵은 제자들과 얼핏 동창인 듯 보이는 선생님이 화장대 위 사진 속에서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네요. 꿈 많던 여고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과 선생님이 계셔서 행복했던 추억의 시간들을 지금껏 간직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제자들의 짝사랑을. 새벽 일찍 등교해 선생님 책상위에 친구들 몰래 올려놓았던 꽃송이들의 수줍은 고백과, 짓궂은 질문과 행동으로 관심을 사고자 했던 노력들을.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지만 그것조차 아름다웠던 기억으로 피어오르는 그리움입니다. 가난의 굴레가 여린 소녀의 자격지심이 되어 명량한 척 위장하고 속으로 울었던 소녀시절, 세월이 흘러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시간이 지난 지금, 진정 행복했다 말할 수 있는 건 골고루 나눠 주셨던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의 씨앗이 화사하게 꽃피어 우리들 인생에 향기를 품게 하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찾아 뵐 생각에 가슴 설레며 '내 아이들도 이 다음 엄마 나이쯤 되었을 때 감사하게 찾아 뵐 수 있는 이런 선생님이 계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경제적인 풍요보다는 세월을 뛰어 넘은 기억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선생님께서 주셨던 가르침과 사랑의 흔적이 있는 어미의 마음을 재산으로 남겨 주고 싶습니다. 오늘 여기 함께한 친구들과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1985년 옥천여고 졸업반 제자들 드림."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열여덟 여고제자들이 오십 줄 학부형 되어 그 옛날 선생님 댁을 찾아 추억을 나누는 만남을 가졌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그들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여인으로 그동안의 세월을 편안히 이야기한다. 신혼의 선생님 댁에 아기 양말, 손 싸게, 발 싸게, 딸랑이 장난감을 사들고 집 앞을 기웃거리던 수줍던 소녀들이 지난 세월의 간격이 무색할 정도로 여고시절 왁자지껄 교실 안에 있는 듯했다. 졸업앨범을 보며 남편과 제자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안 사람 몫에 그저 감사하고 흐뭇할 뿐이다. 가난한 총각선생님을 사랑해 사십 여 년 정년을 맞이하는 동안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가장 잘 한 일은 제자 낳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가르침을 통해 만나고 헤어진 셀 수 없이 많은 제자들. 그들이 이 사회 속에서 성실한 가장으로, 멋진 아빠로, 바른 인성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자상한 엄마로, 매력적인 아내로,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교사로서 충분히 보람된 삶을 살았다 자부한다. 세상이 알아주는 부러워할 만한 지위를 가진 보이는 성공. 그 이상의 교육적 가치를 잘 알기 때문이다. 열정을 다해 가르치던 스승보다 더 나은 청출어람과 같은 제자를 키우는 일, 다음 세대를 감당할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 온 교직을 나는 사랑한다. 우리 젊은 날 인생의 계절들이 그 속에, 그 아이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오늘을 잘 살아가고 있는 훈장 같은 그들이 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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