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이른 봄 친구를 만났다. 찬바람으로 겨울과 봄의 경계가 모호한 날이었다. 봄소식이라며 산수유꽃 사진 두 장을 보여준다. 그녀는 그 길을 몇 년째 다녔지만 가로수가 산수유였다는 것을 올해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녀의 바쁜 생활을 알기에 나는 꽃을 본 마음을 먼저 기뻐했다. 그래서 사진이었지만 산수유꽃은 반가웠고 봄 선물이 되었다.

사진에서 차이점을 찾아보라고 한다. 만개하지 않은 꽃 사진에서 차이점은 간단했다. 붉은 열매와 꽃, 일찍 핀 꽃과 꽃봉오리. 그녀의 눈빛을 살피는데 사진을 확대하여 보여준다. 열매가 달린 가지에서는 꽃이 피지 않고, 열매를 떨어뜨린 가지에서는 꽃이 피었다. 그녀도 지나던 길을 다시 돌아와 사진을 찍었고 마음을 잡은 것은 꽃이 아니라 열매였다.

우리는 떨어지지 않은 산수유 열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무에 대한 문외한이라 추측과 비유로 나무와 열매를 바라봤다. 내려놓는다는 것, 비운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적당한 시기를 알아야 함은 자연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슈가 되고 있는 청년 실업률의 현실로 보면 산수유나무는 노년의 모습이다. 취업이 되지 않아 부모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젊은이는 봄 산수유 열매 같고, 열매를 떨어뜨리지 못하는 나무는 부모 같다. 나무는 열매를 떨어뜨려야 다음 해 꽃을 피우고 다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열매를 떨어뜨려야 하는 나무의 밑이 없고 열매가 썩을 흙이 없는 현실,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없는 추운 봄이 안타깝다. 꽃이 피어서 희망이 되어야 하는데 왠지 무거운 과제가 된 것 같아 마음은 노랗게 물들었다.

한편으로는 산수유 열매가 캥거루족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혼과 취업도 했지만 모든 생활을 부모에 기대어 살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을 비유한 신조어다. 경제적 자립을 하지 않는 자식과 함께 사는 부모를 캥거루부모라고 한다.

캥거루 새끼는 어미의 유아낭 속에 자기 힘으로 기어들어가 산다. 같은 캥거루라고 해도 의지와 의존의 삶은 차이가 있다. 산수유나무도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봄을 맞이하는 의미가 다르다.

꽃에 대한 아픈 기억 하나는 정북동 토성이다. 예전에는 토성 안에 집이 있었다. 봄이었다. 우연히 지나는데 허물어진 집과 함께 살구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크기와 굵기로 보아 오랜 시간 그곳에서 살았을 나무는 뿌리가 뽑혔는데도 꽃을 피웠다.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몰려오는 어둠을 그대로 맞았다. 산산이 부서진 집과 어수선한 물건들 곁에 살구나무는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엎드려 생의 절정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 빛은 울음 같기도 하고, 기도 같은 간절함을 쏟아 내는데 토성 안이 점점 환하게 빛났다. 분홍빛 작은 꽃등은 토성에서 세월을 모두 거두고 하늘로 오르는 듯했다.

어둠이 꽃 빛을 감싸주었다. 나도 살구꽃을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토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처연하고 아름다워서 사위지 않는 꽃불만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이후 정호승 시인의 시'이사'를 만났다. '낡은 재건축 아파트 철거가 시작되고 마지막으로 나무들이 철거된다' 로 시작되는 시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는데/

……

하늘을 우러러보던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질질 끌고/

이삿짐 트럭에 실려 가는 힘없는 나무 뒤를/

까치들이 따라간다/

울지도 않고/

아슬아슬 아직 까치집이 그대로 있는 나무 뒤를

울지도 않고//

시를 읽는데 정북동 토성에서 본 살구나무가 떠올랐다. 저녁이 아니었으면 혹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면 꽃 속에 묻힌 까치집도 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고는 한다. 그래서 시를 떠올리면 통증을 느낀다.

온 누리에 봄빛이 가득하다. 일찍 핀 꽃은 기억으로 남고 새로운 꽃들이 피어오른다. 산책길에 눈여겨 둔 나무로 갔다. 친구의 꽃 사진으로 관심을 갖게 된 아파트 정원 산수유나무다. 몇몇 가지는 열매를 달고 있었는데 잎이 무성하다. 열매가 보이지 않으니 한그루 산수유나무로가 되었다.

부질없던 마음을 꽃잎처럼 날렸다. 지는 꽃은 늦게 피는 꽃이 있어 아름답고 가장 아름다운 꽃은 꽃을 바라보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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