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그르르한 구슬이 암팡지게 열렸다. 그 하얗던 겨울 등지고 봄 햇살에 뽀얀 살결 드러낸다. 물오른 마당에 묘한 생동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매화의 봄을 기다렸을까. 앙다문 꽃잎 속엔 사연도 많겠다. 문득 한 잎 따서 매화차를 마시고 싶다. 아직 개화도 되지 않은 몽우리를 보며 잿밥에 흐려진 나의 이중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수줍기만 하다.

매화를 심어놓고 3년간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살뜰한 마음이 통했는지 작년에 열한 송이였던 매화가 올핸 백 송이가 넘는다. 마당의 봄 단장에 나섰던 남편은 로또라도 된 것처럼 장갑 벗어던지고 작은 몽우리를 세고 또 센다. 손바닥만 한 앞마당에 서식하는 모든 것들은 풀도 아까워하는 남편에게 매화의 출연은 큰 감흥이 아닐 수 없다. 매실의 새콤함보다 묵적 풍류의 삶을 지향하는 고결한 매화를 흠모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본 듯하다.

꽃 전령사라고나 할까. 그는 사시사철, 꽃이 움트고 개화해서 시들고 낙화하는 장면까지 드라마 연출하듯 찍어 올린다. "까톡까톡" 소리가 콩 튀듯 튀면 단톡 방엔 아름다운 꽃의 만찬이 시작되고 이어 감동 먹은 댓글이 벌떼같이 실린다. 여왕벌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꿀벌의 지적 반란이 아침부터 요란하다. 특히 매화가 만발할 때는 영락없는 풍객이 되어 시를 짓고 문장을 낳으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봄 차회도 마찬가지다. 명차로 이름난 몇 가지의 차를 준비했건만 모두 매화의 향기에만 매료된다. 화사한 분위기의 연출로 매화 꽃가지를 화병에 꽂고 떨어진 잎은 수반에 동동 띄운다. 암향에 빠진 사내들의 눈빛이 몽롱해지다가 애첩 다루듯 찻잔에 코를 대며 킁킁댄다. 북송시대 임포는 매화를 아내로 삼았다는데 어떤 심정인지 이해할 수 있겠다. 매화음에 취해 가물거리는 그들의 추임새. 영락없는 선비다.

매화 향기에 빠져 사면초가에 이른 옛 선비들이 어디 한 둘인가. 김홍도는 그림 값 삼천 냥을 받아 이천 냥은 매화 분재를 사고 팔백 냥은 친구들을 불러 밤새 술과 매화타령을 즐겼단다. 뱃골의 충족보다 이상(理想)의 가치를 추구했다. 요즘 같으면 대책 없는 건달이라고 핀잔을 듣거나 이혼 감의 선두렷다. 응집된 꽃잎들이 한 올 두올 어스름한 달빛에 벗겨지면 곧게 뻗어내는 수술 끝자락엔 서릿한 향기가 빛났다. 예술의 경지를 넘나드는 그의 혼이 넋을 잃은 것은 당연하리라.

쌀쌀한 봄날, 얇은 바람결에 사르르 무너지는 매화의 낙화를 본다. 지는 꽃잎에 애달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만 유독 매화의 낙화는 심금을 울린다. 사랑하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던 현종과 양귀비의 애틋함, 아리따운 삼천궁녀들이 낙화암에 투신하는 애절함. 사랑하는 여인에게 대하듯 "매화에게 물 줘라"라고 유언을 남겼던 퇴계 이황의 절개가 아련하게 뻗어내는 매화 향기 같다.

꽃잎나간자리 아쉬울 것 없다. 매 발톱 같은 잎들이 신록을 이루고 새콤한 매실이  오감을 채우니 매화는 사라저도 아주 간 것은 아니다. 봄은 눈으로 오고 꽃은 가슴으로 삼킨다. 향기는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예술을 낳는다. 문학의 건조함을 자연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선비들의 끼. 깊고도 그윽한 암향이다. 곧은 의지와 절개가 다한 지독한 외로움과 그리움을 채워줬던 일등공신 매화. 그래서 매화의 꽃말이 고결, 충실, 인내일까?

아무렴 어떠랴. 매화 향기에 취하고 마시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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