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나는 그림에 문외한이다. 최근에 우연한 기회에 물감 놀이를 시작했는데 몇 번 하다보니 삼족오가 꿈틀거렸다. 오래 전에 고구려 벽화에서 봤을 때의 전율이 상당했나보다. 무의식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느낌이다. 나름의 상상을 발휘해 태양 안에 그려진 삼족오를 그 바깥으로 여행시켜 보았다. 부리엔 꽃을 물렸다. 색다르게 형상화해 변주해나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생뚱맞은 장난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여유도 없고 방향성을 상실한 듯 달려나간다. 사람들은 제대로 생각할 틈이 없다. 끝없이 밀려오는 정보의 홍수를 처리하기에도 버겁다. 생각을 하며 산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사유를 하고 사는지 회의에 잠길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유를 못하도록 은밀히 작동하는 것과도 통한다. 현대 사회는 자연을 도구화시키는 면이 크고 개인개인을 전일성으로 보기 보단 소비자로 남도록 현혹하고 유도하는 경우가 농후하다.

삼족오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따르겠지만 이런 것도 가능할 듯하다. 까마귀의 검은 색은 상수학으로 보면 1에 해당된다. 태양의 빨간 색은 2, 삼족오의 다리 셋은 3, 태양의 원은 0과 통한다. 이런 해석이 타당성이 있다고 한다면 삼족오엔 0부터 3까지의 숫자가 담겨 있는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수들이다. 음양오행론의 말을 빌어 말하면 3목은 1수과 2화의 조화로 나오는 바 이런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음양오행의 기본으로서, 음양오행이 우주 만물에 대한 탁월한 해석 중 하나이듯 삼족오도 그런 거대 그림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비약이라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삼족오가 동양 사상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인 만큼 그 근본으로서 우주와 인간을 하나로 보는 사유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주 곧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고, 인간 개인개인을 소비자나 객체로 전락시키지 않고, 전일성으로 존중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안타깝게도 과거의 훌륭한 전통과 전통적 상징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심사숙고한 상태에서의 선택으로서의 단절이 아니다. 강압적으로 편제되는 세계 질서 속에서 굳어진 것이다. 지금은 세계를 그런 방향으로 구조화시킨 서구 문명에 질주의 성격도 있는 반면에 반성적 흐름 역시 나타난다. 훌륭한 문화 자산을 선물로 받고 태어난 우리는 이제라도 단절되어버린 과거의 소중한 자산들에 마음을 다시 기울이고 그 가치를 음미하며 실천의 장으로 끌어낼 필요가 절실하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가족 동반 자살 등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심각한 사건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삼족오가 능사라는 말은 아니다. 동양철학만이 길이라는 말도 아니다. 동양철학은 그릇된 국가 이데올로기로도 쓰인 경우가 많은 만큼 섬세한 재고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삼족오는 동양 사상 및 동양 문화의 근원에 속하며 그 원형을 지니고 있는 귀중한 상징임에 틀림없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으로 가득 한 완전함을 뜻하는 0의 태양. 그 안에 자리잡은 온전한 존재로서의 1의 까마귀. 그 1 수에 대립되며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불의 이미지. 그 극적인 상호작용 속에 만물을 화생시키는 3목. 그러한 상징들을 품은 경이로운 새. 삼족오는 이처럼 심오한 형이상학과 아우라를 동시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운 상징의 후예인 우리에게서 소외를 받을 정도로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비극적 역설의 존재이기도 하다.

화려와 질주 속에 본질에서 멀어지는 지금 우리가 지녀온 그 가치를 현실 속에 되녹여 풀어나가는 작업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내가 그림에 문외한임에도 불구하고 삼족오에 상상을 입혀 그려 페이스북에 포스팅 해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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