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하는 편지
부치지 못하는 편지
  • 중부매일
  • 승인 2019.05.0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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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난영 수필가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기만 해도 보고 싶고, 그리워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아버지 가신지 65년, 빛바랜 사진첩 속 아버지를 핸드폰에 저장하고 자주 뵙는데도 보면 볼수록 가슴에 그리움이 샘물처럼 고입니다.

아버지! 제가 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무엇인 줄 아세요? 바로 아버지 있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초등학교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 뭐하시니?" 하고 물으시면 죄인처럼 눈물만 글썽거렸어요. 미련퉁이인지 지금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어립니다.

엊그제 아이들이 어버이날이라고 카네이션을 달아주는데도 아버지께 카네이션 한 번 달아드리지 못한 불효자라는 생각에 눈가에 이슬이 맺혀 혼났어요. 죄송한 마음에 부치지는 못하더라도 편지를 쓰려고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더해도 기억나는 것이 없어 답답한 마음에 눈물로 치장하고 말았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실 때 모습은 33개월 된 어린아이의 기억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하니 다행이지 싶습니다.

희미한 등잔불 밑에 아버지가 제단 같은 높은 곳에 누워계시고, 돌도 안 된 동생을 업은 엄마와 언니, 오빠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빙 둘러앉아 있습니다. 조금 있다 이웃에 사시는 할머니와 작은아버지까지 오셨어요. 가족들 얼굴을 훑어보니 하나같이 입은 꼭 다물고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고요하던 방안이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었고, 저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라고 가느냐며 슬피 울던 엄마가 실신합니다. 가족들 모두 큰소리를 내며 울고 있어 무언가 큰일이 났구나 싶어 저도 덩달아 엉엉 울었습니다. 그 이후는 망각의 강을 건넌 것처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아무리 하려 해도 마지막 모습 이외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한참을 잊고 있었는데 제가 중학교 때로 기억됩니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와 돌아가실 때 모습을 말씀드렸더니 언니 오빠는 물론 엄마까지 세 돌도 안 된 애가 무얼 기억하느냐며 꿈을 꾼 것 같다고 하십니다. 제 머릿속엔 분명하지만, 아버지가 높은 제단 같은 곳에 누워 계셨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꿈이려니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떠올리는 유일한 기억이기에 가슴속에 고이 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큰오빠가 아버지 곁으로 가실 때 수수께끼가 풀렸습니다. 큰오빠가 위암 수술을 하였으나 재발하여 집에서 마지막을 보낼 때입니다. 어느 날 찾아뵈니 등이 배긴다고 이불을 몇 개 포개놓고 그 위에 누워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아버지 임종하실 때와 어찌나 똑같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애석하게도 높은 제단은 침대가 없었던 시절 속병을 앓으시던 아버지가 야윌 대로 야위어 등이 배기지 않도록 이불을 쌓아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33개월 된 아기의 눈에 이불 몇 개 포개 놓은 것이 높은 제단으로 보였던 거지요.

33개월 때 기억이 이렇게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은 살아계시는 동안 평생 받을 사랑을 다 주셨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딸이 둘이나 있는데도 딸 낳기를 희망하셨다는 아버지!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시대에 시골의 가난한 선비 집 셋째 딸로 태어났어도 아버지가 귀한 딸이라며, 쥐면 꺼질세라 불면 날세라 애지중지하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키우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철없는 딸이 보리밥을 안 먹겠다고 투정 부리면 화롯불에 쌀밥을 손수 해서 먹이고, 입 짧은 딸을 위해 병원 다녀오실 적마다 비스킷을 사다 무릎에 앉혀놓고 다른 형제들에게 뺏기지 않도록 다 먹어야 밖에 내보내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귀한 딸 낳았는데 해를 넘기면 안 된다며 한겨울에 5㎞나 되는 면사무소까지 눈길을 헤치며 가서 출생신고를 하셨고, 이름도 난과 같이 기품 있고 고고하며 단아하게 살아가라고 난영(蘭英)으로 지어 주셨지요. 좋은 이름 때문에 직장 다닐 때나 사회에 나와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늘나라 가시기 석 달 전 자식들이 아비 얼굴은 알아야 한다며 백릿길 마다하지 않고, 청주까지 가서 명함판 사진을 찍어다 놓으셨지요. 그 사진 아니었음 저는 평생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가슴앓이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저에게는 큰 산이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버지 사진을 들여다보며 위안으로 삼았으니까요. 청주여고에 합격하고도 입학금을 내지 못해 동당 거리다 극장에 가서 온종일 울면서 아버지께 애원했던 기억은 아릿한 옛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임종하시면서도 어머니께 귀한 딸이니 쌀밥 먹여 잘 키워 달라는 유언까지 남기셨다지요. 태산보다도 높은 남다른 부성애에 감읍하며,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남은 삶 부단히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평생 제 버팀목이고, 스승님이자 멘토이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인연 맺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으니 감사합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실 때 어린 자식들이 밟혀 눈도 제대로 못 감으셨지요. 이제는 모든 시름 놓으시고 영면하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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