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충청취재본부장

'일차원적 인간(one dimensional man)'이 있다. '인간이 일차원적'이라고? 그렇다면 이차원적, 삼차원적 인간이 있다는 말인가? 일차원은 기하학적으로 직선이나 곡선을 말한다. 이차원은 선의 시작과 끝이 만난 평면이다. 삼차원은 평면이 이어진 공간, 입체다. 인간을 평면이나 입체가 아닌 선(線)으로 비유한 것을 보면 인간을 냉소적으로 빗댄 표현임은 분명하다.

'일차원적 인간'은 20세기 중반 독일계 미국 사회학자, 사상가인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한 말이며 그의 책 제목(1964년)이기도 하다, 왜 인간을 '일차원적 인간'으로 비유했을까? 평면도 입체도 만들지 못하고 선만 긋는 수준으로 인간을 치부했는가 말이다.

기술과 자본을 바탕으로 한 산업화는 모두에게 영원히 물질적 풍요와 행복, 그리고 사회적 진보를 담보할 위세였고 사실 어느 정도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풍요와 행복 그리고 진보는 실세가 아닌 허세였다. 실세는 부자유와 소외 그리고 자연 착취였다. 이런 사회 구조의 모순에서 빚어진 인간이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다. 그렇다면 현생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원 디멘지오널(Homo one-dimensional)'로 대체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일차원적 인간의 전회(轉回)'란 말을 써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산업화를 추동하고 있는 과학기술은 스스로 만능의 척도임을 자부하며 부지불식간에, 교묘하게 인간에게 내재화, 사회화되고 있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신뢰를 넘어 맹신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과학기술을 모든 사회현상의 해결자로 인식하며 사고의 권리를 과학기술에 위탁했다. 하지만 이 마음가짐에는 가공할 만한 독소가 자란다. 상상력 등 사고력을 좀먹는 독소 말이다.

좀먹은 사고는 인간으로 하여금 기존 규범이나 사회제도 등 사회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인간과 사회의 모순을 느끼지 못하고, 발생하는 사회현상도 문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같은 통제의 사슬은 '인간이 주체이고 사회가 객체인 상황을 사회가 주체고 인간이 객체'가 되게 만들었다.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빚어졌다. 사육사가 던져주는 고기만을 받아먹는 동물원의 맹수와 같다. 어쩌다 스스로 먹이를 잡아먹기도 한다. 그러나 졸고 있는 먹이인줄 알고 미끼를 덥석 물어 삶을 망친 물고기에 불과하다.

'일차원적 인간'은 면과 입체를 만들지 못한다. 상상력 등 사고력이 부족하다. 한 차원 더 사고를 깊이 하지 않으려 한다. 할 수도 없다. 사회가 이미 모든 것을 알려주고 지시해주기 때문이다. 손 안 대고 코푸는 셈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코 주변은 더러워진다.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인간의 일차원화'에는 '판옵티콘(Panopticon)'도 큰 역할을 했다. 감방을 원형으로 만들고 그 가운데 감시탑을 세워 죄수를 감시하는 건물이다. 죄수들은 감시탑 내부를 볼 수 없어 24시간 감시를 받는다고 믿고 그것이 내재화된다. 감시자가 없어도 죄수는 내부 규율을 철저히 지킨다. 이 '판옵티콘'이 바로 '현대 사회'라고 지적한 학자가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감옥 그 자체"이며 규율로 인해 인간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시와 통제를 느끼지 못한 채 마치 행복한 자유인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일차원적 인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현대 사회는 대중통제와 관리 권력을 가진다. 권력에 맞설 수 없는, 아니 그 권력에 맛들인 인간들은 결국 '일차원적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마르쿠제 활동기에는 기술진보가 낳은 옥동자 스마트폰이 없었다.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현대인은 일차원적일까? 다차원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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