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다 짙게 스며들다

금산 사람들의 마음 속 진산으로 통하는 진악산에는 천년을 지켜낸 은행나무가 있다. 숲길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곳, 금산 사람들은 이곳을 진악산 보석술래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 금산군<br>
금산 사람들의 마음 속 진산으로 통하는 진악산에는 천년을 지켜낸 은행나무가 있다. 숲길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는 곳, 금산 사람들은 이곳을 진악산 보석술래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 금산군

[중부매일 김정미 기자] 예로부터 사람들은 고을을 보호해주는 산을 진산(鎭山)이라고 불렀다.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상처와 시련의 시기에는 마을 주민들의 삶을 위로하고 희망을 키워주는 넉넉한 품을 제공했다. 금산 사람들에게는 진악산이 그렇다. 산과 강이 아름다워 금수강산의 줄임말로 금산이 되었다는 고장. 금산 진악산 보석술래길로 안내한다. / 편집자



임진왜란 시기 가장 많은 전투가 있었던 고장, 금산에서의 전투는 많은 희생자를 낳았지만 끝내 호남을 지켰다. 아픔을 간직한 충절의 고장. 금산의 많은 둘레길이 순례길, 혹은 술래길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금산문화원은 몇 년 전부터 금산의 역사·생태·문화의 길을 '술래길'이라 부르고 있다. 술래가 되어 금산의 아름다움과 문화 숨결을 찾아보자는 의미다. 강강술래 하듯 손잡고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며 걸어보자는 뜻도 담고 있다.

진악산을 가로지르는 보석술래길은 넉넉한 자연의 품을 느낄 수 있는 금산의 대표적 생명 길로 통한다.

보석사 일주문을 시작으로 의병승장비와 보석사, 은행나무, 목교를 지나 샘물바위에서 영천암으로 향해도 좋고, 도구통바위로 걸어도 좋지만, 내처 진악산 정상의 관음봉을 마주한 뒤 수리넘어재로 나와도 좋다.

진악산 보석술래길은 보석사 일주문에서 시작된다. 우뚝 솟은 나무들과 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물 소리가 어우러지는 곳, 오후의 햇볕을 받은 나뭇잎들이 산들바람에 반짝이며 부서지는 모습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일주문을 지나 갈림길 왼쪽으로 접어들면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 의병승장비다.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 영규대사를 추모하는 순절사적비다.

공주가 고향인 영규대사는 갑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에서 수도를 했는데 보석사에도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추모비는 1840년 영규대사의 초상화를 모신 사당 의선각과 함께 세워졌다. 비문을 지은이가 우의정 조인영, 글씨를 금산군수 조취영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비문을 지은 조인영은 추사 김정희의 절친으로, 1840년 추사가 모함으로 죽을 고비에 놓였다가 목숨을 건지고 제주로 유배갈 수 있었던 것도 조인영의 조정이 있어 가능했다.

의병승장비는 1940년 일본 경찰이 비각을 헐고 자획을 훼손해 시련을 겪었으나 스님들이 몰래 땅에 묻어두고 보존, 광복 후 다시 세우며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의병승장비를 지나면 숲길이 이어진다. 진한 숲 향을 전하는 보석술래길에선 생장을 멈춘 나무도 풍경이 된다.

껍질이 다 벗겨진 채 오래된 생의 역사를 그대로 고백하고 말았지만, 회오리치듯 키를 올리며 성장해 온 줄기와 나뭇결을 마주하면 절로 겸허해진다. "참으로 애 썼구나"라는 위로와 격려의 감탄이 흘러나온다.

절을 지을 때 앞산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보석사. 보석술래길에선 보석 아닌 것들이 없을 만큼 나무도 계곡도 햇볕과 바람도 길 위의 차이는 돌들도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대표적 상징물이 은행나무다. 조구대사가 보석사를 지을 당시에 심었다고 하는데, 은행나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의미가 있다.

불멸의 상징,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불릴 만큼 참으로 오래 사는 드문 식물이다. 처음에는 여섯 그루였던 것이 한그루가 됐다는 설도 전해지는데, 땅 속으로 뻗은 나무의 뿌리가 백 평(330㎡)은 족히 된다고 하니 시간이 키운 나무의 장엄함을 짐작할 수 있다.

천년하고도 백년을 넘기며 오늘을 지키고 있는 보석사 은행나무에도 시련은 있었다. 나라에 우환이 있을 때마다 큰 가지가 잘려나갔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잘린 나뭇가지에서 울음소리가 났다고 전했다. 전하는 말로는 임진왜란, 한일강제합병, 한국전쟁 때도 은행나무가 울었다.

스님이 30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던 보석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명성황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순종을 제외하고 낳은 아이들을 모두 잃었던 명성황후가 왕자의 무병장수를 기도하며 인연을 맺은 곳이 보석사였다.

보석술래길의 문화, 자연 보물찾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재가 살고 있는 계곡물이다. 보석사 아래쪽, 일주문을 지나 산책로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물소리가 맑고 경쾌하다.

서로 다른 채도를 자랑하는 초록의 나뭇잎들, 굵기를 달리하는 나무, 돌에 낀 이끼와 떨어지는 물소리가 그려내는 풍경은 수채화보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

보석사에서 진악산 등산로로 올라서면 초입에 목교와 포장도로 갈림길이 나오는데 어디로 가나 영천암 입구에서 만나게 된다. 어린이들도 가볍게 오를 수 있을 만큼 도구통바위 전까지 등산로가 잘 정비된 곳이 또한 보석술래길이다.

처음 가는 길은 없다. 누군가는 역사의 길을 내었고, 누군가는 생명의 길을 지켰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연의 길을 열었다. 푸른 5월, 금산 진악산에 가면 길 위의 길을 만날 수 있다.

※도움말: 금산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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