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성범 수필가

올 봄 학기에 '문학과 휴머니즘'이란 과목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것이지만 문학은 글(文)에 관한 배움(學)이요, 학문이다. 글은 말(言)과 대비된다. 글은 말에 비하여 명확성과 영구성이 특징이다. 말은 불명확성과 일시성을 속성으로 갖고 있다. 무릇 의사소통과 정감의 교류에 있어서 말과 글은 그 본래적 소명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 본래적 사명을 갖고 있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문학의 기능은 무엇인가? 문학의 삶과의 상호작용과 영향은 무엇인가? 등 참으로 어렵고도 많은 질문과 문제, 영역이 무한하게 펼쳐진다.

일반적으로 '문학(literature)은 삶의 거울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찍이 최재서님은 이렇게 역설했다.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의 일면이고 전면은 아니다. 어느 작품을 보아도 거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 마치 사진기가 풍경이나 인물을 촬영하듯이 문학이 현실을 그대로 모사(模寫)하지는 않는다. 문학의 목적은 좀 더 별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생에서 소재를 선택해 그들의 모양을 다소 수정하고 혹은 다시 결합해서 한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한도에서는 기록이지만 새 세계를 창조하는 한도에서는 예술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기록면과 예술면을 가진다. 이 두 면 중에서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기록과 예술의 두 면을 구비함으로써만 작품은 완전하다고 말이다.

물론 문학은 빵을 만드는 학문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인격과 양심을 충족시켜 주며 때로는 정신적 구원을 주기도 하고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인생 도처에 크고 작은 문제와 갈등과 투쟁이 도사리고 있는 '지금, 이곳(now and here)'의 우리 삶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힘들고 고단하다고 함부로 포기하고 주저앉거나 되돌아 설 수도 없는 한계상황(限界狀況, marginal situation, a boundary, limits)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성범 수필가
이성범 수필가

여기에서 문학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삶의 용기와 지혜를 주고, 문제 해결 능력과 방법을 은밀히 전수한다. 심지어는 읽는 사람의 정신과 영혼에 감동의 빛을 쪼여서, 그 인간 자체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환골탈태시키고,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시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 문학 활동은 근원적인 차원, 동물적 차원의 삶이 아니라 인간적 삶을 영위케 해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문학 속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반추한다. 그것은 문학 속에서 자아와 뗄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작품을 내놓고, 그 안에서 독자와 교감한다. 이는 작품을 통해서 서로에게 끌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품세계와 나와의 삶이 비로소 합하였을 때 그 안에는 무수한 작용이 일어난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이 온몸이 떨리는, 전혀 새롭고 진한 감동을 통한 인간의 부활이요, 구원이다. 이것이 문학 작품의 최고의 경지요, 문학의 목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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