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5월은 순순한 꽃향기로 그득하다. 노랑, 빨강, 분홍, 화사한 4월의 꽃이 진 뒤를 이어 5월이 눈 시리게 하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길가에 이팝나무는 소쿠리 가득 쌀 튀밥을 이고 신작로를 걷고 있다. '아름다운 우정과 청순한 사랑'이란 꽃말을 갖고, 추억송아리를 다글다글 매달고 있는 아까시아 꽃향기는 또 얼마나 달큰한가. 요즈음 지천으로 흩날리는 아까시아 꽃이 올해는 유난히 향기가 더 짙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도 싱그럽다.

"아름다운 계절에 태어났네요."

아침부터 수없이 카톡카톡 꽃배달이 온다. 밴드에서도 축하인사와 꽃바구니가 만발이다. 밝은 햇살, 순한 바람을 안고 이 세상에 온 것이 내심 흐뭇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생신 때면 한마디씩 하시던 엄마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노인네가 꼬장꼬장해서 생일날은 유난히 더 춥다며 동지섣달인 아버지 생신을 탓하곤 하셨다. 생일상을 차리려면 앞뒤 허술한 나무 부엌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황소바람에 일하기가 망하다고 하셨다. 당시 시골 우리 동네에서는 가장이 생일이면 동네 어른들을 불러 미역국 한 그릇일망정 아침을 나눠먹곤 했었다. 옆에서 돕는답시고 상에 행주질을 하고 수저를 놓으면 주르륵 미끄럼을 탔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에 비하면 내 생일을 춥지도 덥지도 않은 때라서 생일 해먹기도 좋고, 엄마 또한 몸조리하기도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들 좋은 계절에 생일을 맞았다고 축하 인사를 하는 가운데 같이 의원을 지낸 분이 한마디 하신다.

"어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겠네." 느닷없는 말에 순간 멍해졌다. '엄마가 왜?'하는 내 눈초리를 의식하고 덧붙인다. 일 년 중 가장 배고플 때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보릿고개가 바로 이 무렵이라고 하셨다. 가을 양식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았을 테니 먹을 게 없는 산모가 얼마나 배가 고팠을 것이냐는 거다. 난 여태 그걸 몰랐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오죽하면 요즘 한창 흐드러진 하얀 꽃나무에 이팝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이제야 헤아려 본다. 꽃나무를 보고 하얀 쌀밥이 떠올라 '쌀밥나무, 이밥나무' 하다가 이팝나무가 되었다 하지 않는가. 전설은 더욱 눈물겹다.

경상도 가난한 시골 마을에 열여덟 살, 착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온갖 구박을 받으며 살았다. 어느 제삿날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조상님께 올리는 쌀밥을 짓는 것이라 뜸이 잘 들었는지 확인하려 솥뚜껑을 열고 밥알 몇 개를 입안에 넣었다. 이것을 본 시어머니는 제삿밥을 몰래 먹었다하여 쫓아내고 말았다. 맨 몸으로 쫓겨난 며느리는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죽었고 이듬해 그 자리에 하얀 쌀밥 같은 꽃을 피운 나무가 자랐다.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은 이 나무를 며느리 이밥나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다.

산모는 먹고 돌아서도 금방 배가 고프다는 말은 들었어도 엄마가 나를 낳고 배고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질 않았다는 사실이 더 어이없다. 나는 알고 보니 말로만 듣던 그 무서운 보릿고개에 태어나 엄마를 힘들게 한 딸이었나 보다. 가끔씩 하얀 꽃을 보면 무채색 쪽진 머리 엄마를 떠올리며 애잔한 마음이 들곤 했지만 그것은 엄마가 안고 태어난 팔자 때문이려니 했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엄마는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십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부터 밥하고 집안일을 했다 한다. 새 어머니의 구박은 없었지만 그 어머니가 들에 나가 일하시는 동안 여덟 살짜리가 절구통 밑에 받침을 놓고 올라가 보리 절구질을 하여 저녁을 지어 놓았다한다. 언제가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 나는 이모, 외삼촌을 막연히 싫어했다. 훤칠한 키도, 먹성 좋은 입맛도 보기 싫어 외갓집을 가지 않았다. 엄마만 유난히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것은 새 어머니 밑에서 눈치 보며 어려서부터 동생들에게 먹을 것 다 빼앗기고 고생을 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키가 미처 자라기도 전부터 시작된 일은 팔십 일기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숙명처럼 따라 붙었다. 그런 엄마를 생각하면 애잔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엄마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일 좀 그만하라는 말 이외 달리 할 것이 없었다. 뒤늦은 깨달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혹여 시간을 되돌려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엄마와 손잡고 이팝꽃 하얀 저 길을 걸으며 엄마의 응어리진 마음을 다독여 안고 싶다.

키워드

#에세이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