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달덩이 같은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몸통 가운데가 볼록 거울처럼 자연스럽게 솟아오르고, 너비가 두어 뼘쯤 되는 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연한 분홍색 바탕에 들깨 알 만한 검은 점이 듬성듬성 박힌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몸매다. 차가운 피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니 온기가 살아나는 듯하다. 볼수록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물상, 원형의 몽돌이다.

몽돌은 억겁의 세월을 품은 돌이다. 모진 풍파에 시달리며 다듬어낸 자연의 조화이자 시간이 만든 산물이다. 애당초 이 돌도 울퉁불퉁한 돌조각이 아니었을까. 거친 면이 세월에 갈리고, 삐죽삐죽 모난 자존심마저 스스로 깎아내며 살아온 건 아닐까. 자연에 순응하며 자신을 내려놓고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현재의 모습으로 거듭났으리라.

몽돌이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 왔을까. 들꽃이 좋아 자주 찾는 화원이지만 그동안 내 눈에 띄지 않았던 돌이다. 뜰 안 어느 곳에 놓아도 잘 어울릴 것 같아 선뜻 품에 안아본다. 제법 묵직하다. 돌 표면이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게 어머니 가슴처럼 안온한 느낌이다. 갖고 싶은 욕심에 주인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고 한 걸음에 돌아와 볕이 잘 드는 뜰팡에 놓아본다. 집 분위기에도 잘 어울리는 게 보기가 좋다.

나이가 듦인가. 자꾸만 잔잔한 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꽃과 돌과 나무가 좋아진다더니, 요즘 내 마음이 그렇다. 그 중에 돌은 언제나 제 자리에서 묵묵히 세파를 견뎌내며 변함없이 의연하게 자리한 모습이 듬직하여 좋다. 굳이 기암괴석이 아니라도 괜찮다. 마치 추상화를 보듯 계절에 따라, 마음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어떤 물상보다 돌을 닮고 싶은지도 모른다.

몇 해 전 거제도로 떠났던 가족 여행이 떠오른다. 남해를 품은 학동 마을이다. 학이 비상하는 형국의 해안이 해금강과 외도를 안산처럼 바라보며 누워있다. 쪽빛 세상이 수평선 안팎으로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고, 일렁이는 파랑이 해변에 부서질 때마다 태고의 소리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늘과 바다와 땅의 공명이 어우러져 생명의 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우주의 신비로움을 담은 듯 검은 돌맹이들이 파도에 온몸을 내맡기며 나그네를 맞는다. 몽돌해변이다.

몽돌엔 선사 시대를 동경하는 다양한 묘경이 담겨 있다. 암갈색 몸에는 물결이 만든 천지 만물의 형상이 새겨있다. 인간도 세파에 시달리며 자신만의 얼굴을 만들어내듯이, 거친 풍상을 버텨내며 제각기 자신만의 무늬를 만들어냈지 싶다. 몽돌이 전해주는 묵시록을 자신의 몸에 새겨 보여주는 듯하다. 자연에 거스르지 말고 자신만의 색깔을 지니며 돌처럼 살아가란다. 탐석 삼매경에 빠져 '발견의 미학'을 만끽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내가 돌의 미학을 느낀 곳이 또 한 군데 있다. 남덕유산 자락에 흐르는 화림동 계곡이다. 동호정 아래 차일암 주변에 깔린 몽돌이 내 발길을 사로잡는다. 모양과 색깔이 어찌나 곱고 예쁜지 눈을 떼지를 못하게 한다. 무심코 지나쳤던 돌에서 느껴보지 못한 미학에 또 다른 신세계를 보는 듯하다. 두 곳의 여행지에서 경험한 새로운 미의 세계를 한동안 잊고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돌의 아름다움을 일깨운 것이다.

몽돌을 보며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떠올린다. 최고의 선이 물이란다. 물과 돌은 무언으로 나에게 삶의 자세를 알려준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품고 아우르며 흘러가 저 푸른 바다가 된 물처럼, 매끄러운 돌처럼 모나지 않게 살아가라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전석불생태(轉石不生苔)라고 했던가.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앉지 않는다. 내 자신도 이끼가 끼지 않는 돌처럼 늘 깨어 있으리라. 몽돌처럼 모든 걸 품으며 묵묵히 삶을 관조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강전섭 수필가
강전섭 수필가

삼라만상의 지혜와 형상이 담긴 몽돌을 집어 가슴에 품는다. 중생들의 오욕과 칠정을 간직한 심오한 소리가 들린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가라. 사람마다 생각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둥글둥글 함께 걸어가는 인생길을 만들어가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몽돌을 자그시 쓰다듬으니 마음이 절로 순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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