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여행] 김홍철 '건축의 탄생' 저자

플랭클린 루스벨트 포 프리덤스 파크(Franklin D. Roosevelt Four Freedoms Park). / 김홍철
플랭클린 루스벨트 포 프리덤스 파크(Franklin D. Roosevelt Four Freedoms Park). / 김홍철

1974년 3월 17일, 뉴욕 펜실베이니아 역 화장실에서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는 한 노인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사인은 심장마비.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여권 정보는 지워져 있었다. 그 이유로 시체 공시소에서 이틀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그는 정보가 다 지워진 채로 화장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까? 이 이야기는 어느 추리 소설의 한 대목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소크생물학연구소와 킴벨 미술관으로 유명한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의 이야기이다. 그는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엄청난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여 몸이 점점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프로젝트와 강의를 위해 무리하게 여러 나라를 다녔었고,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프로젝트로 인해 막대한 채무를 지니고 있었던 탓에 몸이 버티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결국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 심장마비로 필라델피아 역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신원 확인을 위해 그의 가방을 열어보니, 루스벨트 대통령을 추모하는 플랭클린 루스벨트 포 프리덤스 파크 (Franklin D. Roosevelt Four Freedoms Park) 계획안이 들어있었다.

맨해튼과 퀸스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 리버 위에 기다랗게 생긴 섬이 하나 있다. 그곳의 이름은 한때 블랙웰 아일랜드 (Blackwell Island)라고 불렸었으나, 부정적인 의미를 지우고자 웰페어 아일랜드(Wellfare Island)라고 이름을 바꿨다. 한때 정신병원, 천연두 전문병원 그리고 감옥이 운영되던 섬이었다. 도시로부터 사람을 격리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1972년 뉴욕시는 그곳을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공원화 사업을 진행하며 섬 이름을 32대 대통령 이름을 빌려 루스벨트 섬으로 바꾸고 설계를 루이스 칸에게 맡겼다. 그러나 록펠러 주지사와 후원자들이 줄줄이 사임하고 1974년 칸은 갑자기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덩달아 뉴욕시는 파산 직전까지 가게 되자 공원사업은 중단되어 기약 없이 연기되었고, 섬은 슬럼화 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루이스 칸의 유일한 아들 나다니엘 칸은 성인이 되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 도중 그는 아버지가 진행하고 있었던 프로젝트인 '플랭클린 루스벨트 포 프리덤스 파크' 설계도를 발견했고, 마침내 2012년 이 공원은 계획된 지 4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공원은 1941년 1월 6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에서 강조한 '네 가지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경제 대공황과 나치를 극복하자는 취지로 '인권과 자유'를 강조한 연설이다. 첫째는 의사표현의 자유, 둘째는 신앙의 자유, 셋째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넷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루이스 칸은 공원을 기다란 이등변 삼각형으로 설계했다. 5그루의 너도밤나무를 입구에 두고 120그루의 린덴 나무를 양쪽으로 두 줄씩 정원과 앞마당에 배치했다. 걸을수록 점점 좁아지는 삼각형 나무 행렬 끝에는 화강석 벽을 묵직하게 두고, 그 가운데에 청동으로 만든 루스벨트 흉상을 두어 걷다 보면 결국 그를 만날 수 있는 극적인 연출을 기획했다. 공원에서 가장 끝에 위치한 '룸(Room)'은 강을 조망할 수 있는 공원의 테라스이다. 그곳에서 넓은 강 너머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며 루스벨트가 말하던 자유를 느껴보라고 칸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김홍철 '건축의 탄생' 저자
김홍철 '건축의 탄생' 저자

그의 마지막 건축은 자유를 이야기했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쓰러지는 마지막까지도 건축을 손에서 절대 놓지 않았다. 어릴 적 얼굴에 화상을 입었을 때 그의 할아버지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했었지만, 그는 그림과 음악으로 그 고통을 이겨냈다. 그리고 건축으로 자신을 키워냈고, 결국 그의 나이 쉰이 넘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알렸다. 건축은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돌파구였으며 삶 자체였다. 그는 건축을 할 때만큼은 자신의 상처를 잊고 자유로움을 온전히 느꼈으리라. 그는 쓰러질 때까지 프랭클린 포 프리덤스 파크 건축도면을 들고있었다. 그의 자유는 건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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