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유명 영화제에서 큰 상을 수상했다. 영화제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보는 재미와 세상을 향한 강렬한 메시지를 인정받아 처음부터 수상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필자도 유명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입소문에 '기생충'을 보았다. 조만간 천만관객을 돌파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리는 것을 보면 '기생충'은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한 흔치않은 영화중의 하나인 듯하다.

'기생충'을 본 어떤 영화 평론가는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난해한 영화평을 남겨 평론의 적절성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무수한 상징이 있는 낯선 장르의 영화에 대한 짧은 영화평에 대해서 평범한 시민들이 논쟁을 할 만큼 '기생충'이 우리 사회에 던진 영향은 분명했다.

'기생충'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혹은 계층)을 소재로 하고 있고, 계급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에 날선 비판을 해왔던 봉준호 감독의 기존 영화를 고려하면 '기생충'은 부자의 영역에 어쩔 수 없이 기생하는 빈자의 경제적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 어록을 인용하지 않아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리고 현실계에 형평의 신이 존재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각자에게 귀속하는 이득과 손실을 절대적 형평에 따라 균등하게 나눌 수 없음은 분명하다. 결국 절대적 가치 척도를 자본으로 보는 자본가와 노동으로 받아들이는 노동자는 서로를 기생하는 존재로 느낄 수 있다. 이런 시각차는 20세기 지구를 반으로 나누는 전쟁을 벌이게 했고, 세계 종말이 우려되는 상황으로까지 전개되기도 했다.

이에 세계 각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들의 기생적 관점을 법과 제도로서 해소하려 노력해 왔고, 현재에도 각종 사회법을 제정하여 자본가와 노동자의 공생의 토대를 힘겹게 만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공생을 지향하는 법과 제도가 사람들에게 내면화되어 계급간(혹은 계층간) 갈등을 치유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생충'은 그 갈등의 지점을 영화적 상징을 통해 '명징'하게 '직조'했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안했다. 필자는 매월 20건 가까이 개인파산관재인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그분들의 경제적 파탄의 원인은 '기생충'에서와 같이 대부분 사회구조의 문제이다. 그리고 구조의 문제를 개인차원에서 해결하지 못한 개인들 대부분은 모질지 못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모질었다면 다른 누군가를 제로섬 게임에서 밀어내고 살아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질지 못한 파산자의 고된 일상은 어쩌면 영화보다 더 아슬아슬하다. 라이브인데 오죽할까. 그러니 그 현실을 담아낸 '기생충'을 필자가 관람객으로만 편히 감상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결국 영화는 가진 자의 '오만'과 '편견'으로 인해 파국으로 막을 내린다. 노동을 제공하는 쪽에서는 자본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면서 자본가의 오만과 편견을 드라마틱하게 강조한다. 물론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그런 설정이 노동자의 폭주에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은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고,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결국 오만과 편견은 나와 다른 사람과의 삶을 공생이 아닌 기생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런 자본가의 오만과 편견은 노동자가 자본가를 노동기생충으로 바라보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노동자의 극단적 시각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기생충과 살 것인지, 공생하는 동료와 살 것인지는 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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