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정유감] 이락사의 슬픔
[세정유감] 이락사의 슬픔
  • 중부매일
  • 승인 2005.06.0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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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를 지나 자동차가 멈춘 곳은 이락사였다.

이락사! 그곳은 노량해전에서 전투를 독려하다 적의 총환을 맞고 전사한 이순신장군을 최초로 모신 곳이었다.

‘전방급 신물언아사(前方急 愼勿言我死)’,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이 애국의 유언은, 이제는 커다란 돌에 새겨진 유언 비(碑)가 되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나라사랑’을 생각하게 하고 있었다. 1592년 임진년… 그저 평온하기만 했던 이 땅에 왜군이 쳐들어왔다. 그리고 이십 여일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선조임금이 계시는 한성까지 무혈 함락되고… 임금의 어가는 피난길에 올라, 이 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풍전등화와도 같은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처럼 나라가 절박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장군은 최초로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승리는 적군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었고, 무소불위로 전진을 거듭하던 왜군의 발걸음에 제동을 거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한편, 그때까지 왜군을 격퇴할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던 이 땅의 젊은이들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의병을 자원 했고, 호국불교를 자랑하는 스님들은 승병이 되어 백병전을 펼쳐가며 싸우고 또 싸워서 이 나라를 겨우 지켜냈던 것이다.

이처럼 ‘절망을, 희망으로’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한 장군을 그리며, 이락사 경내로 발길을 옮겼다. 장군이 이 세상을 떠난지 사백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곳은 상중(喪中)인 듯 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경내의 소나무는 지금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우는 듯 하고… 마치 식음을 전폐하고 곡(哭)을 하는 상주처럼, 하늘 향해 수 갈래 가지를 펼친 채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가녀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난날 장군을 지근에서 모셨던 휘하의 제장들과도 같은 충성심으로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듯 했다. 슬픔에 잠긴 듯한 소나무를 위로하면서 경내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는 수 백 여년은 됨직한 소나무와 향나무가 지난시절 장군과 함께 꺼져가는 이 나라를 지켜내려 고뇌했던 승병장이나 의병장처럼 경륜 있고, 덕 있는 표정으로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 듯 했다.

오솔길을 따라 노량해전을 치른 관음포 앞바다가 바라보이는 첨망대로 향했다. 첨망대에 오르니 거북선을 이끌고 찌렁찌렁한 목소리로 학익진(鶴翼陣)을 갖출 것을 지시하며, 왜군을 무찌르던 장군의 모습이 아련하다. 바다 저 멀리 광양만에서 들려오는 철 때리는 소리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너와 내가 따로 없다’고 재삼 일러주는 듯 하면서…

이락사! 그곳은 지금도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애국의 땅’이었다. 소나무를 비롯한 향나무, 동백나무, 측백나무, 대나무 등 사계절 변하지 않고 지조를 상징하는 나무는 물론, 그곳에서 자라는 풀 한포기 까지도 장군의 애국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은 듯 했다.

독도 문제가 채 해결되지도 않은 현실에서, 하루에도 수 백 여명의 이 땅의 젊은이들이 우리 ‘대한민국’의 국적을 포기하고 있단다. 그것도 병역을 면탈 할 목적으로… 그러나 불과 백 년 전에도 이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와 선대 어르신들이 ‘조국이라는 우리들의 큰집’을 지켜내려 희생 했는가를 다함께 생각해보자.



/수름재 주유소 정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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