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충청취재본부장

초등학교 시절 절친이 한 명 있었다. 쉬는 시간, 화장실 갈 때 등 학교에서 많은 시공간을 공유했다. 집은 다른 방향이었지만 교문에서 만나 같이 등교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친구에 대해 늘 아쉬운 점이 있었다. 남자임에도 여자 같았기 때문이었다. 말도 그렇고 행동도 그랬다. 심지어 생각하는 것도 계집애 같았다. 어떤 때는 화가 나서 "넌 도대체 남자냐, 여자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 친구는 왜 여자처럼 사고와 행동을 했을까? 신체가 남성임에도 남성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5형제 중 막내로 위는 모두 여자였다. 심지어 아버지가 마도로스(원양선원)였기 때문에 남자인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집안에 남자는 유독 그 친구 혼자였다. 역할모델(role-model)이 가족 내에서는 여자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누나들은 여자들의 사고와 행동을 유지했고 의도성은 없지만 부지불식간에 동생인 그 친구에게 여성적인 영향을 주었다. 역할 모델의 기능은 타인의 사고와 행동을 그대로 혹은 비교를 통해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문제해결 과정을 효율적으로 학습하는 데 있다. 특히 유아기 때는 이런 학습이 더 철저하다. 그 친구 역시 그러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칼 구스타브 융에 따르면 인간은 '가면을 쓴 연극배우, 다른 원형(archetype, 실체)이 있는 그림자'라 한다. 이런 그림자의 상태가 '페르소나(persona)'다. 이는 외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를 바라는 자신의 모습, 이른바 사회적 자아다. 융은 이 페르소나의 원형을 바로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로 보고 있다.

'아니마'는 남자의 의식 저 밑, 무의식 속에 잠재한 여성적 심성이다. '아니무스'는 여자의 의식 저 밑, 무의식 속에 잠재한 남성적 심성이다. 이런 잠재한 성징들은 사회적 학습이나 고립된 영역에 발현되기도, 억압되기도 한다. 남자지만 '아니마'가 발현된 남자는 여자의 성징을 비교적 많이 가진 반면 여자지만 '아니무스'가 발현된 여자는 남자의 성징을 비교적 많이 가진다.

인간의 성징은 사회적 학습과 처한 상황에 따른 사회적 산물이다. 특정한 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역할모델이 누구이며 학습과 내면화의 강도에 따라 'Sex(태생적 성)'와 'Gender(사회적 성)'가 일치하지 않은 수도 있다. 아마 그 친구는 어린 시절에 한정하면 '아니마'가 발현해 다소 여성적이었지 않았나 싶다.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마지막은 신화적인 이유다. 그리스 아리스토파네스는 원래 인간은 세 가지로 태어났다고 한다. 신은 인간을 '남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가 서로 붙은 형상으로 만들었다. 현 인간의 신체 부분보다 두 배 더 가졌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붙은 경우 자웅동체로서 종족번식 본능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가 생겼다. 인간이 너무 힘이 세고 종족번식률이 증가하다 보니 신에게 제사를 거부하는 등 신(神) 경시는 물론 대적에 이르기까지 했다. 두고 볼 수 없었던 제우스는 둘을 갈라놓았다.

남남(男男) 동일체는 그냥 남자의 성징, 여여(女女) 동일체는 그냥 여자의 성징이 남았다. 문제는 남녀 동일체의 경우였다. 분리된 상대의 성에 대한 그리움과 분리에 따른 허전함을 해결해야 했다. 여기서 작용한 것이 바로 신체 분리에도 정신 속에는 상대의 성징이 남아있었다. 이 그리움과 허전함에 대한 충족이 바로 잠재된 다른 성징의 발현이었다.

아마도 그 친구는 남녀 동일체였던 후예(後裔)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남자를 남성으로, 여자를 여성으로 고착화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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