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속살은 뽀얗고 야들야들하다. 그럼에도 제 의지로 벗은 게 아니어 선지 겸연쩍은 모양새다.

오래된 더덕을 쉽게 까려고 단단한 껍질에 칼집을 내어 끓는 물에 담갔다. 껍질을 벗기며 얼마 전 일을 떠올린다. 스스로 벗어야 당당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퇴직을 하고 근무 시 하지 못한 봉사활동을 찾아보았다. 남들이 꺼리는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하여 1인 1책 강사를 하게 되었다. 주위 분들이 '이제 하고 싶은 것을 하니 원 풀었다.'라는 농담을 하며 사회 공헌활동도 같이 해 볼 것을 권유했다. 교육을 받고 회원들과 같이 노인 주간보호 센터 공연 및 돌봄 봉사를 나가게 되었다.

악기 연주와 노래를 전문가처럼 잘하는 다재다능한 회원들이 많아 뒤에서 보조를 하였다. 쑥스럽지만 어르신들의 팔을 붙잡고 흥을 돋우는 소극적인 봉사를 하고 돌아온 것이다.

적극적인 봉사를 하려면 껍질을 완전히 벗고 새로 태어나야 하는데.

40년의 공직생활로 알게 모르게 몸에 밴 관료의식이나 권위의식을 먼저 통째로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매미는 땅속에서 7년여 고행을 거친 끝에 굼벵이 껍질을 벗고, 꿀벌도 본래는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라고 한다.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날기 어려운데 그것을 모르는 꿀벌은 당연히 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여 날 수 있게 되었다. 곤충뿐만 아니라 자작나무도 허연 겉껍질과 누렇고 벌건 속껍질을 모두 벗는다. 그렇게 하얀 아기 속살을 드러내면서 거목으로 성장해 간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껍질을 쉽게 벗지 못하고 습관의 굴레 안에서 안주하려 한다.

의복같이 착용해온 위선의 탈, 체면의 탈을 벗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하회탈같이 웃는 모습이 되고 봉산탈춤으로 관객을 즐겁게 하는 순기능이 있지만 말이다.

적극적인 봉사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안고 월악산 등산을 하게 되었다. 월악산은 이름처럼 기암괴석과 낙락장송이 어우러져 천혜의 비경을 자랑한다. 암벽을 기어올라 정상의 널따란 바위 위에서 쉬게 되었다. 생경한 새의 깃털과 발톱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처음에는 누가 이곳에서 새를 잡았나 했지만 매의 깃털과 발톱이라고 한다. 남편은 어린 시절을 월악산 아래 동네서 성장해 매의 피나는 껍질 벗기를 알고 있었다.

매는 일반적으로 한 40년쯤 살면 부리와 발톱이 무디어지고 날개의 깃털도 빠진다고 한다. 깃털이 빠지니 제대로 날기 어렵고 부리와 발톱이 날카롭지 못하니 먹잇감을 사냥하기 어렵다. 결국 먹지를 못하니 힘이 빠지고 굶어 죽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보통 매의 수명을 40년으로 잡는다.

하지만 오래 사는 매들은 다르다. 깃털이 빠지고 부리와 발톱이 무디어지기 시작하면 아무도 없는 바위 꼭대기로 올라간다. 그 매는 거기서 부리로 바위를 쪼고 바위에 부리를 갈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피투성이가 되면서 원래 부리가 빠지고 새 부리가 난다. 새 부리가 나고 상처가 아물면 다시 그 부리로 깃털과 발톱을 물어서 뜯고 뺀다. 생 깃털과 발톱을 빼는 고통이 끝나면 새 깃털과 새 발톱이 나고 그 매는 40년을 더 산다. 피눈물 나는 자기 극복의 과정과 껍질 벗기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초등학교 학예회에서나 부르던 실력이지만 매의 삶을 교훈 삼아 열심히 연습을 했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던가. 마침 가수 버금가는 회원이 불참을 했는데 퍼포먼스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주저주저하는 체면의 껍질을 벗고 용감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대신 나왔으니 못해도 양해해 주리라는 위안을 하며 민요 한 곡과 트로트 한 곡을 불렀다. 타고난 흥이 있는 데다 한 3년여 라인댄스를 해서 춤사위로 손발을 맞출 수 있었다. 껍질을 벗으니 비로소 매미가 되고 나비가 된 것이다.

요즈음은 매미가 이렇게 노래하고 나비는 이런 춤을 춘다며 으스대듯 어르신들의 흥을 돋우었다. 눈을 맞추고 팔을 같이 잡으며 덩실덩실 판을 벌렸다.

'사람은 두 번 산다. 생이 한 번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두 번째의 생이 시작된다.'라고 공자는 일찍이 설파하시지 않았던가.
 

이영희 수필가

※약력
▶1998년 한맥문학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맥문학회원, 청풍문학회장 역임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칡꽃 향기', '정비공'
▶충청북도교육청 방과후학교 지원단장 역임
▶현재 청주시 1인1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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