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공부할 땐 공부하고 놀 땐 놀아. 엄마하고 손가락 걸고 약속."

나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곧잘 들어온 말이다. 저 말을 하는 부모는 저 말이 당연한 줄 안다. 저 말은 의심 없이 쓰이고 쓰여 몇 십년간 되풀이 되고 있다.

공부와 놀이. 그 두 세계를 왜 분리시키는가. 공부가 놀이이고 놀이가 공부인 것을. 이렇게 그 문장이 해체되는 것을 본 것은 '두줄 아카데미'라는 이색적인 모임에서였다. 모임의 리더인 이동규 교수님에 의한 것인데 문제 없는 듯 보이는 문장에 도사린 무지와 그로 인한 폭력성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실은 그날의 다른 주제에 대한 양념 정도의 말인데 그에 깃들인 의미가 커 내 안에 진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그렇듯 별 생각없이 내뱉어지는 저 말엔 섬뜩한 무지가 도사려 있다.

공부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우선 새롭게 열려야 한다.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지혜가 공부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발견이다. 놀이 또한 호모 루덴스라는 말이 있듯 인간을 정의하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며 인간과 문화를 가치 있게 하는 주요 요소임에 틀림없다. 공부와 놀이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이 별개로 분리하는 태도는 그 대상인 아이들의 무의식 안의 고유한 무늬들과 충돌을 일으켜 교란시킨다. 손가락까지 걸어 약속한다면 반발 심리가 억압되기에 강박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자식을 편협하게 만들고 자칫 망가뜨릴 수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말이 있다. 하이데거가 한 말로 이때의 언어는 시적 언어에 가깝다. 시 자체가 지금은 폄하되고 있지만 그런 세상이 바람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언어의 최상인 시적 언어 속에 존재가 거주한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이다. 하이데거의 말보단 편하게 와닿는다. 이 말은 우리의 일상에도 낱낱이 해당된다. 공부할 땐 공부하고 놀 땐 놀아. 그 말에도 물론이다.

이런 말들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쓰이는 말에 독소가 있다면 정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사랑스런 자식에 관한 문제라면 더할 나위 없다.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이지 지향해야 할 것은 아니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문제가 없이 보이나 실은 심각한 문제를 품은 언어들은 이것 말고도 주변에 즐비하다. 우리나라의 교육과 문화는 아주 중요한 그 지점에 대해 턱없이 안이하다. 안타깝고 애석하기 그지없다.

사례로 든 말에만 국한해 말한다해도 생각할 거리와 개선점, 담론의 광장이 풍성하게 생성될 수 있다. 참공부가 무엇인지, 놀이는 무엇인지, 공부를 어떻게 놀이 문화로 프로그래밍 할 것인지, 놀이는 공부로 어떻게 구현할지, 참사랑은 무엇인지, 선진 문화는 무엇인지 등등 말이다. 그런 진정한 가치의 아름다움에 눈을 뜸은 물론 가치 창출의 현장에 주체적으로 설 수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최전선의 자리에 선 존재가 부모이다. 그런 존재의 집은 얄팍한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걸맞지 않을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에 검은 독소가 슬프게도 들어 있기에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의 가능성을 선보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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