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쳐디자이너

불가마에서 태어난 달항아리가 아니다. 땅속에서, 물속에서 건져 올린 달항아리이다. 버려진 그 곳에서, 애물단지로 치부받던 아픔에서, 죽음의 기로에서 생명과 예술의 온기로 새롭게 탄생했다. 종이로 만든 이종국 작가의 달항아리, 녹조로 빚은 달항아리는 반전의 미학이다. 감히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는 인식의 확장이자 창조의 발현이다.

500년을 이어온 달항아리는 순백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항아리는 무게감이 있어 달처럼 하늘에 뜰 수 없지만 이종국 작가의 달항아리는 종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물속에서 솟아올랐기 때문에 하늘에 띄울 수 있다. 끝없이 밑으로 하강하면서 끝없이 상승하는 그 기막힌 모습을 보라. 한국의 모든 달항아리 역사를 새롭게 보고 재해석하는 순간이 아니던가.

초가지붕 위에 박을 심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 그 속에서 흥부의 박타령이 생기고, 달항아리가 탄생됐으며, 월인천강지곡이 되었다.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고, 지붕위의 박을 보며 삶의 애틋함을 노래했으니 그 곡진한 마음을 담아 달항아리를 만들었다. 바가지를 만들고 그림을 그렸으며 삶의 풍경이 되었다.

세계의 모든 문명은 변방에서 만들어졌다. 변방에서 시작돼 중심으로 이동한다. 한국의 막사발이 일본에서 국보로 대접받고, 한국의 막춤이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한국의 막국수가 세계인의 입맛을 유혹하고 있다. 막걸리는 또 어떤가. 막 자랐지만, 천덕꾸러기였지만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며 진한 감동이 되고 있다. 한국의 문화원형 모두가 그렇다. 상처깊은 풍경에 한국인의 마음이 깃들어 있고, 세계를 보듬고 품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관광버스에서 춤추는 민족은 한국인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자유롭게 추는 것을 막춤이라고 한다. 비틀즈를 뛰어넘는 기록을 쓰고 있는 BTS도 막춤이라는 우리의 DNA가 내재돼 있다. 싸이의 말춤도 그렇지 않은가. 진정한 창조는 경직성의 파괴에서 시작되다. 우리 삶 속에는 수많은 날줄과 씨줄이 있는데 새새틈틈 스며있는 그 무엇을 건져 올리는 일이다. 세계를 놀라게 하는 한국의 모든 것은 이렇게 삶의 최전선에서 피와 땀과 눈물로 빚은 것들이다. 우연이고 필연이며 운명이다.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공자는 아는 자를 지지자(知之者)라 했고, 좋아하는 자를 호지자(好之者)라 했으며, 즐기는 사람을 낙지자(樂之者)라고 했다. 최고의 행복은 즐기는 사람이다. 앎을 좋아했다면 이제는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이 문화이어야 하고 예술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이의 발견은 지식의 시작이다. 글을 쓰고 담고 기록해 왔으니 인류의 역사문화와 지식정보가 가능했던 것이다. 앞으로는 단순한 지식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좋아하는 자가 되고 즐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융복합 창의 인재와 창조콘텐츠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미래는 디자인, 스토리, 조화, 놀이, 공감, 의미가 중요하다,

한국인은 버린 것을 활용하는 재주가 뛰어나다. 솥에서 밥이 타면 버리지 않고 누룽지를 만들어 먹고, 김치가 오래돼 먹을 수 없으면 묵은지를 해서 먹었다. 이처럼 우리민족은 처음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드는 재주가 있다. 대청호의 녹조로 달항아리를 만든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쓰고 버린 오물이 모여서 녹조가 되었는데, 이것들을 물속에서 건져 올려 달항아리를 만든 기막힌 창조를 봐라. 반전의 미학이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종국 작가의 '종이를 품은 달' 특별전에서 이어령 선생은 한지로 만든 달항아리의 신비를 이렇게 예찬했다. 버려진 것들에 생명의 온기를, 예술의 가치를,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보여준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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