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1981년 덕산면 도로정비사업 풍경
1981년 덕산면 도로정비사업 풍경

덕산면 미루나무 가로수길 정비사업 현장이다.
마을 장년들이 솔선수범 참여해 가래질을 한다.
장치를 잡고 가래 날을 조절하는 장부잡이와
줄을 잡고 당기는 줄꾼이 어여차 호흡을 맞춘다.

한 명의 장부꾼에 줄꾼 둘을 일러 세 손목 한카래요,
장부잡이와 줄꾼 넷의 조합을 다섯 손목 한카래라 함은
여럿이되 힘을 조절하며 한 몸처럼 움직이기 때문이요,
메기고, 받는 사람이 절로 마음이 엄불려 있음을 의미한다.

한뜻 한마음이 아니면 멋대로 헛춤을 추어대는 가래,
가래질은 함께하는 일 중에서 믿음과 협동이 돋보이는 
우리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대표하는 노동의 형태요,
농경문화의 정겹고도 아름다운 우리네 일 풍경이다.

'가래 장부꾼은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래질, 특히 가래를 잡는 장부꾼의 역할은 그만큼 농사일 중 가장 힘든 일로, 기술이 좋고 힘도 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1981년 한적한 시골마을 덕산 미루나무길 도로정비사업 현장 풍경은 외려 정겨워 보인다.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일하는 모습이 훈훈하게 하면서도, 흙먼지 뽀얗게 이는 비포장에 어릴 적 추억이 깃든 미루나무 길이 여유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보따리를 이고지고 그 길을 걷어서, 또는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4일, 9일 닷새마다 열리는 덕산 구말 장터를 오갔을 테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흙먼지와 미루나무 사이로 불어 다니는 바람을 벗했을지도 모른다. 호미 들고 엎드려 일군 농토에서 수확한 작물을 내다팔고 그 돈으로 식솔들에게 먹일 자반이나 고무신, 옷가지들을 사들고 오는 한 어머니의 발걸음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가뿐해진다. 호주머니에 십리사탕이라도 몇 알 들어있으면 더 없이 행복하였을 게다. 내 어린 날 흔히 보아온 풍경이다.

이런 시골 마을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인근 논과 밭, 마을과 야산을 밀어 제켰다. 포클레인, 불도저 등 대형 장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휩쓸고 간 자리에 최신 도시형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계획된 도로와 건물은 구조도 색상까지도 고려되었다. 철저한 계획에 의한 도시로 탈바꿈 된 것이다. 구불구불한 신작로는 반듯한 아스팔트길로 사방팔방 뻥뻥 뚫렸다. 자연지형에 따라 집이 들어서고, 그와 연하여 구불구불 길이 이어지던 풍광을 그림자도 없다. 불과 몇 십 년 전, 마을사람들이 땀 흘리며 서로 힘을 보태 가래질로 마을 길 도랑을 정비하던 풍경 또한 아득한 전설로 묻히고 번듯한 혁신도시가 건설된 것이다. 고사성어에서나 보던 '산전벽해'가 따로 없다. 

철저하게 계획된 혁신도시에 주요 공공기관이 들어서고, 우뚝우뚝 솟아오른 아파트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건물의 높이만큼 더 높은 꿈을 안고 몰려들었으리라. 하루가 다르게 인구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4~5년 전, 몇 천 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일만 명을 넘어 서는가 했더니 2만 명을 훌쩍 넘겼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진천군 덕산면은 지난 7월 1일 드디어 덕산읍으로 승격이 되어 힘찬 팡파르를 울렸다. 도시형 미래로 향하는 축포 소리다. 이제 또 다른 시작점에 서있다, 지치지 않고 멀리 가기 위해 지나온 길, 그 과정을 되짚어 봐야할 때이다.

수백 전 전부터 이어온 덕산은 예사롭지 않은 문화적 자산을 품고 있는 곳이다. 고대 철 생산지인 석장리 유적과 산수리 삼용리 백제 요지가 일찌감치 터를 잡고 있다. 용몽리 질 좋은 논바닥에서는 풍년을 꿈꾸며 부른 들노래소리가 구성졌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목숨을 함께한 이영남 장군의 혼도 묻혀 있다. 송인묘소, 산수리 마애여래좌상, 덕산양조장 등 문화적 기가 저변에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말장터에서 왁자하게 벌어졌던 민초들의 강한 삶의 의지와 인정, 풀잎 같이 여린 사람들의 뭉쳐진 소리가 오늘의 덕산을 지켜낸 저력이 아닐까 싶다. 

문득 가래질하던 일손 잠시 내려놓고 신작로 바닥에 질펀하게 앉아 막걸리 한 사발 쭉 들이켜고 너털웃음 터트리던 장부잡이와 줄꾼들의 얼굴이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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