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보통 계약서 같은 서류를 쓰는 중요한 곳에는 꼭 도장을 찍는다. 이런 도장이라서 그랬을까?

어린 시절 어머니는 도장을 한 곳에 두면 위험하다고 찬장 그릇에다도 놓고 액자 뒤에 숨겨 놓기도 했다. 집에 도둑이 든 다음부터는 더 자주 자리를 옮겼다.

아주 가끔 어머니는 도장 보관 장소를 너무 자주 옮겨 잘 못 찾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도장을 잘도 숨겨 놓았다.

내가 처음 내 도장을 갖게 된 건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중학교 때가 아닌가 싶다. 내 첫 도장은 나무도장으로 평범한 도장이었다. 하지만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도장이 마냥 신기해 인주를 꾹꾹 묻혀 책과 공책에 열심히 찍어댔다.

마치 그림 그리듯 찍어 놓은 도장은 멀리서 보면 붉은 꽃이 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주변에서 어른들은 도장을 몸에다 찍거나 손에 잘 못 묻으면 도장병(?)이 걸린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그 병이 참 아름다울 것 같아 한번쯤 걸리고 싶었다. 손목이나 손등에 피는 붉은 도장꽃.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꽃 같았다.

중학교 때 우리 반 한 친구가 도장을 꽤 잘 팠다. 특히 펜대에 이름을 새기는 걸 잘했다. 선생님이 사용하는 도장 같아 신기했다. 그 덕에 우리 반 친구들은 색다른 도장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저녁노을이 반쯤 들어온 교실에 남아 도장을 파는 친구의 모습은 꽤 진지했다. 마치 미술책에 나오는 르누아르의 그림 속 주인공 같았다. 친구가 만들어 준 도장을 꽤 오래 간직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다른 도장이 생기면서 그 도장을 쓰지 않게 되었고, 지금은 곁에 없다.

그 친구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은행나무가 있는 한 쪽 옆, 삐그덕 유리문을 옆으로 열고 들어가는 도장 가게에서 친구가 환하게 웃고 있을 것 같다. 도장을 사용할 때마다 문득 그 친구 생각이 나곤 한다.

그 이후 고등학교 미술 시간인가, 사군자를 배우고 나름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때 그림 옆에 찍는 도장이 멋져 우리는 지우개로 그 낙관을 만들었다. 멀쩡한 지우개를 사 조각칼로 요리조리 도려내어 이름을 새겼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살다보니 도장 선물을 몇 번 받았다. 예전 도장은 한문 도장이 대부분 이었는데…, 내가 처음 받은 한글 도장은 잊을 수가 없다. 그냥 이름을 그대로 파면 될 것을 한글이 마치 한문처럼 보였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게 신기했다. 도장 속 한글이 아름다웠다. 그 도장을 꾹, 하고 찍으면 마치 빨간 한 송이 꽃 같았다. 내 이름 석 자가 한 송이의 꽃처럼 고개를 내미는 것 같았다.

또 하나 도장을 선물 받았다. 첫 동시집을 낼 때였다. 출판사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낙관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게 되어 짜릿한 감동을 받았다. 지금도 새 책을 내고 누군가에게 보낼 때는 그 낙관을 사용한다.

첫 낙관을 찍을 때부터 그 이후 어느 순간부터 생각하나가 스쳤다. 바로 도장 속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이름으로 서로 불릴 때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누군가에게 내 이름이 찍혀 전해지는 건 책임을 가져야겠다.

그리고 사람이 살다보면 좋은 일에 도장을 찍을 일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긴다. 이왕이면 설렘이 있는 좋은 일에 이름 석자가 빛나는 도장을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마치 꽃 같은 삶의 향기도 가득 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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