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아버지의 굽은 손가락에는 팔십년 넘은 긴 세월이 들어있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사선의 고비를 넘은 전쟁과 중동 건설 현장 속 눈부신 산업화까지 힘겨운 격동기를 살아오셨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늘 반공을 강조하셨고 절약과 검소함이 몸에 배어있는 아버지의 삶이었다.

"아버지다, 김 서방은 잘 있냐? 애들은 건강하고?" 천천히 띄엄띄엄 생각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어눌한 목소리로 안부를 확인하시는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전화선 넘어 보이는 듯 아련하다. 아버지 건강과 엄마는 어떠신지 80노부부의 안녕을 여쭈어야 할 딸에게 매번 먼저 전화를 챙기시는 친정아버지다.

친정아버지 전화를 받고 나면 눈물이 핑 돌고 목젖이 젖어오는 가슴 뜨거움이 있다. 이순을 바라보는 시집간 딸자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고 조금이라도 잘한 것 있으면 반드시 그 것보다 더 큰 칭찬을 해주시는 나의 아버지.

우리 아이들 키울 때는 엄마의 높은 눈높이와 잣대로 인해 칭찬하며 키우기보다 꾸중하고 상처 주며, 사춘기 아이들과 관계가 소원했던 부족한 엄마였다. 아버지가 보실 때 딸자식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칭찬으로 우리를 키워주신 아버지의 성숙한 인격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평생을 바르고 올곧게 성실히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은 내 어릴 적 가정교육의 뿌리였다. 온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은 시간이면 쌀 한 톨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농부가 씨 뿌려 땀 흘린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밥알 한 톨도 남기지 말고 감사하게 먹는 식사예절을 가르치셨다. "앉을 땐 무릎 꿇고 바르게 앉아라", "상대방의 눈을 마주 보고 상냥하게 인사해라", "신발을 벗으면 돌려서 가지런히 놓도록 해라." 잔소리 같던 수 없는 가르침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아버지의 밥상머리교육이었다. 때로 동생과 나의 머리를 감겨주실 때마다 "이것들 이렇게 키워 어떻게 시집을 보내나. 이다음 결혼해서 남편이 아빠처럼 머리를 감겨 줄까나?"하시던 아버지. 잘못한 벌로 매를 맞고 훌쩍이는 날이면 얼굴을 씻겨 주시고는 자장면 집으로 데리고 가 "니들 미워서 때린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 거야"라고 말씀하실 때 어린 마음에도 그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느껴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눈물 섞어 비벼 먹던 그 특별한 외식은 지금껏 잊을 수 없는 애틋한 추억이다.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공부하다 책상에 엎드려 깜빡 잠들다 깨어나면 책갈피 속에 꽂혀 있는 아버지의 메모. '작고 귀여운 우리 딸. 잠든 모습마저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가!' 아! 나는 사랑 가득한 그런 아버지의 정서 아래 칭찬 속에 자란 아버지의 딸이었다.

시집와 아이들 낳고 사위에 손주까지 둔 있는 딸이라도 당신께는 영원한 애물단지인가 보다. 구순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치매 초기 진단을 받으셨다. 당신의 핏줄 사남매, 그의 짝꿍들 넷, 친손 외손 증손자까지 보셨으니 이제껏 건강하게 참 잘 사셨다. 더 이상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될지 모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없어지기 전, 더 지주 찾아뵙고 전화 드려야 할 것 같다. 전화선 타고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지금도 나를 키우고 가르치는 사랑의 젖줄 또 다른 에너지 충천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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