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부매일
  • 승인 2019.07.11 13: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세이] 최시선 수필가

세상을 살면서 늘 물과 함께 한다. 보고 마시고 씻고 버린다. 언제나 곁에 있는 물, 몸에 품고 있는 물. 만일 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물은 어떤 존재일까 하고 질문을 던지곤 한다. 어쩌면 생뚱맞은 의문일지 모른다. 물은 물인데 거기에서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없으면 목마르고 마시면 시원한 것을.

불가에서는 물을 사대 요소 중의 하나로 본다. 만물의 근원으로 네 가지가 있다.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이다. 이를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고 한다. 땅은 굳고 단단한 기운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고, 물은 습한 기운으로 만물을 성장하도록 하며, 불은 따뜻한 기운으로 만물을 성숙하도록 하고, 바람은 움직이는 기운으로 만물을 변화시킨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도 존재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계절하고도 맞아떨어진다. 땅이 겨울이라면 물은 봄이요, 불이 여름이라면 바람은 가을이다. 겨울엔 땅이 단단히 굳어있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웅크리고 있다. 만물이 그 차갑고도 딱딱한 땅에서 생명을 꿈꾼다. 봄은 물이다. 부드럽고도 습한 기운이 감돌며 만물이 싹을 틔운다. 대지가 녹으며 물을 만들고 생명을 키운다. 여름은 불이다. 따뜻한 기운이 시나브로 익으면서 뜨거운 에너지가 넘친다. 이는 만물을 성숙하게 한다. 가을은 바람이다. 온갖 생명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여 영글도록 한다. 이른바 결실의 계절이다.

사람도 만물의 일부라서 사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태어날 때 이 네 가지가 잠시 화합하여 왔기에, 사라질 때는 이것이 흩어진다. 이 흩어지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온 곳에서 온 곳으로 돌아가는 변화이다. 사람이 죽을 때 제일 먼저 몸이 굳어지고, 물이 빠져나가고, 몸이 식고, 마지막으로 바람이 나간다. 숨을 거둔다 함은, 바람이 몸에서 나가 다시는 들어오지 않음을 말한다.

물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물은 부드럽지만 강하다. 은혜롭지만 해를 끼친다. 물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지만 단박에 죽여 버리기도 한다. 부드러움이 칼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다. 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유람선을 타고 관광을 즐기려다 강에 빠져 죽는 사람, 여름철 물가에서 놀다가 빠른 물살에 휘감겨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 겨울에 얼음을 지치다가 차가운 물에 빠져 죽는 사람. 모두가 물로 인한 재앙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여름 방학이 되어 자취방 책을 싸들고 고향 시골집에 갔다. 때마침 친한 친구들 세 명과 함께 갔다. 하룻밤을 잤는데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대충 내리다 말겠지 하고는 어머니가 해준 토종닭 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비가 두어 시간 동안 신나게 퍼붓더니 도랑물이 넘쳐 길가로 올라왔다. 조금 있더니 물의 마수가 마당으로 뻗쳐왔다. 우당탕탕 온갖 물건들이 부딪치며 사랑채 기둥을 때리면서 외양간을 휩쓸고 나갔다.

잠시 소강상태. 나는 물의 위력을 그때 처음 보았다. 늘 도랑에서 잔잔한 물만 보다가 물이 그렇게 화난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다. 흙탕물에다 근육질의 물살이 울퉁불퉁 산맥을 이루면서 거침없이 흘러갔다. 함몰된 곳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거품을 토하기도 하고, 벽을 만나면 커다란 물기둥을 만들며 정글의 야수처럼 포효했다. 비는 한 시간이나 더 내렸다. 이제는 물이 뜰팡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래 시골집은 마당 위에 뜰팡이 있고, 뜰팡 위에 마루가 있다. 이쯤 되니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 꼼짝없이 죽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다행히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어쩌다가 친구들과 시골집에 와서 물에 휩쓸려 죽을 뻔했으니. 하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노자 도덕경 제8장에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이 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여 다투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고 했다. 그렇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 순리요, 다투지 아니하니 평화요, 가장 낮은 곳에 처하니 겸양이다. 허나 물은 함이 없는 그 자체이므로 자성이 없다. 다시 말해 인격성이 있어 선악을 판단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 자체로 무위자연이다. 모아지면 홍수가 되고 흩어지면 가뭄이 될 뿐.

물 앞에 겸손할 일이다. 그저 물이 품고 있는 덕을 배울 일이다. 기왕이면 나는 바닷물이 되고 싶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다 품어 줄 수가 있으니까.
 

최시선 수필가
최시선 수필가

※약력
▶2006년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부회장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수필집 '삶을 일깨우는 풍경소리'
▶진천 광혜원고등학교 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