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작 사인암에서
장영주 작 사인암에서

도청소재지 청주를 흔히 교육의 도시, 양반의 도시라고 한다. 인구에 비해 학교가 많고 공부를 많이 하니 지성도가 높고 마음씨도 순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는 좋은 뜻은 양반이고 나쁜 뜻은 후줄그래 한 핫바지이다. 같은 충청북도에서도 남쪽 사람들은 보다 유하고 북쪽으로 갈수록 좀 더 거칠어진다. 그건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팩트이다. 만주의 거란군, 세계 최강의 몽골군도 박달재를 넘지 못했고 일제에 대항한 한반도 최초의 무장 봉기도 충주와 제천 인근의 봉양 땅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건국 이래 인구 대비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사람들도 충북인이다. 지금은 제천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이야기가 됐지만 60년, 70년대는 '제천 와서 털리지 않은 사람 없다', '청량리 깡패들이 제천으로 조공 들이러 온다'는 속설도 있었다.

여하튼 중학생이 되자 다시 아버님을 따라 제천에서 다시 청주로 나온다. 가장 인상 깊은 광경은 등하교 길에 지금은 가늠조차 어려운 옛 청주역 근처를 지나노라면 짐마차를 끄는 수 십 마리의 말이 마부와 함께 모여 있었다. 특유의 말 냄새와 투레소리, 말 잔등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말 그림으로 나름 유명했던 내 머리에 깊이 각인돼 버렸다. 전생에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누비던 존재였던가?

말을 실컷 보고 그려야 겠다. 몽골이나 가볼까.

청주 중·고를 나오고 서울로 대학유학을 가는 대신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려고 청주교대에 입학했다.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서울대, 육사, 고대 등 명문대학교에 진학한 동창들 보기가 부끄럽고 민망하다. 졸업 후 청원군 북일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으니 만 23세에 남을 가르치는 교사가 됐다. 스스로 생각해도 '애가 애들을 가르치는' 모양새이다. 어느 날 아침, 숙직을 마치고 퇴근하던 길에 우연히 홍익대학교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교 미술반 동기를 마주 쳤다. 다방에 들러 가장 비싼 계란 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를 대접하고 미대 대학생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천경자 교수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 갈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큰 분발심이 솟구쳤다. 나름 준비를 해 중, 고등학교 미술과 준교사 자격증 시험을 보니 어쩌자고 첫해에 덜컥 합격을 한다. 초등학교 교사 의무기간 2년을 채우고 청주 세광중학교 미술 교사가 돼 5년을 재직한다.

그 홍익대학교 학생이 지금 추상화가로 유명한 김재관 화백이다.

"친구, 고맙소. 덕분에 내가 정신을 차렸으니 또 쌍화차 한 잔 대접하리다. 늘 건강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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