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아디스아바바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였다. 에티오피아가 커피로 유명한 나라라서 우리 일행은 그곳의 작은 가게에서도 커피를 주문했다. 안주인인듯한 흑인 여자가 문 밖으로 나가더니 나무에서 가지를 꺾는다. 몇 줌 들고 와 벽돌에 걸쳐 놓고 발로 밟아 더 잘게 분지르려 한다. 잘 안되는지 온몸을 쓰고 있다. 나는 안쓰러움도 일고 즐거움이 발동해 그녀 곁으로 다가가 함께 분질러나갔다. 그녀는 미소로 반응해 주었다.

그녀는 작은 화로에 잘게 분질러진 나뭇가지들을 긁어 담고, 찌그러진 물주전자를 올린 후 불을 피웠다. 물이 은근히 끓는 동안 그녀는 손절구를 가져와 미리 볶아둔 커피콩을 넣고 빻기 시작했다. 나는 구경하다가 공이를 달래서 빻아 나갔다. 고소한 향기가 번졌다. 커피콩이 가루가 되자 그녀는 주전자 안에 털어넣었다. 펄펄 끓는 물에 커피 가루가 녹는 동안 그녀는 우리 앞에 잔 하나씩 놓았다. 커피가 완성되자 잔이 넘치도록 따라주었다. 잔이 비워질 때마다 몇 번이고 넘치도록 따라주었다.

사소한 일일 수 있음에도 그 일이 생각나곤 한다. 친구들에게 얘기하면 상당수가 부럽다고 한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사실 자체에 나는 아련해지곤 한다. 저 일이 일어난 곳이 이국인데다가 에티오피아라는 것도 작용은 할테지만 다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커피숍에서 주문해 마시는 커피는 커피 공정의 극히 일부이다. 우리는 비용을 지불하고 커피를 마신다. 쾌적한 실내에 선곡된 음악과 좋은 의자와 테이블이 제공된다.

에티오피아의 그 가게에도 의자가 있긴 했다. 그러나 기우뚱거리는 나무 의자로 볼품 없었다. 실내 아닌 마을 어귀의 실외였으며 음악 따윈 없었다. 테이블도 없었다. 퉁퉁한 흑인 여자가 천연의 얼굴 표정으로 즐겁게 노동을 하며 따라주고 따라준 것뿐이다.

나는 커피 나무를 심을 때부터의 전과정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커피를 끓이는 얼마 간의 과정에 내 몸이 충분히 담겨 있었다. 나는 손님을 넘어서 밀도 깊은 과정에 주체적으로 깊숙히 참여했다. 땔감을 획득하는 것에서부터 불 피우는 일, 커피콩을 가루로 만드는데 즐거움으로 뛰어들었다. 커피 주문부터 시작해서 커피를 여유있게 마시고 일어날 때까지 무려 두 시간 정도 동안 가슴 속에 뿌듯하게 차오르던 충일감. 몇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듯한 기분을 주곤 한다.

친구들이 부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똑같은 DNA가 그들의 몸 속에도 있다는 것이다. 도시의 쾌적한 커피숍에서 선곡된 음악과 함께 마시는 일보다 원초적으로 더 당기는 것이 있음에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흑인 여자 입장에서 보면 그토록 풍성한 베품을 선사하고도 받은 돈이 얼마 되지 않는다. 커피의 세계적 산지이면서도 그 혜택에서 거리가 먼 에티오피아를 생각해도 가슴에 먹구름이 인다. 그런 착잡한 상황 속에 내게 주어졌던 시간이 은총이라 여겨지며 그런 일을 만나기 어려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안쓰럽게 보였다. 실로 우리는 정작 소중한 것들이 상실된채 살아간다. 무엇을 상실한지도 잘 모른다. 충만한 체험만이 알려 줄 수 있는데 그런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충일감의 발견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은 주체적이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구조적으로 굳어지다시피한 세상에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 글이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이 글에 담겨 있다면 가슴이 스산하게 아파지는 것, 그것을 땔감으로 삼아 우리 주변의 작은 것들로부터 변화시킬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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