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중국 계림의 용나무 뿌리는 위에서 아래로 자란다. 나뭇가지에서 돋아나 아래로 내려오며 자라다가 땅에 닿으면 한그루 나무가 된다. 여러 가닥 중 몇 개는 대나무를 쪼개 지주를 만들어 주어 안전하지만 대부분 바람에 흔들리고 서로 엉켜서 나뭇가지를 감싸고 있다. 용나무 곁을 지날 때면 마치 밀림을 걷는 듯 신비롭고 위에서 하늘거리는 느낌 때문에 긴장감을 더한다.

뿌리가 아래로 자라는 것은 계림은 년 중 200여 일 비가 온다고 한다. 습하고 축축한 기온이 흙 없이도 나무뿌리를 키우는 셈이다.

여행 가기 전 몇 평 안 되는 땅에 씨앗을 뿌렸다. 오랜 가뭄으로 땅이 말랐는데도 충분한 물을 주지 않았다. 싹은 나오지 않고 흙만 갈라졌다. 머리가 쭈뼛 섰다. 물을 주고 또 주었지만 막막하고 미안한 마음은 갈라진 흙 틈을 메우지 못했다. 씨앗은 흙 속에서 본성으로 나오리라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씨앗도 마음이 있어서 뿌리는 사람의 정성을 기억한다는 것을 실패 후에야 알았다.

씨앗만 적절한 환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도 그랬다. 온몸 세포가 말라가는 것 같고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했다. 비대해지는 몸과 달리 마음은 점점 메말랐다. 소소한 것에 더 민감하고 화를 냈다. 대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것이 먼저 보였다.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유순해진다고 하는데 나는 비판적이고 주관적인 주장이 강해졌다. 좋은 것에만 마음을 열었다.

갱년기 증상이라고 했다. 갱년기는 한 번만 겪는 것이 아니라 몇 번씩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갱년기 우울증이라고도 했다. 젊다는 생각만큼 행동은 따르지 않고, 언뜻언뜻 느끼는 몸의 변화에서 오는 불안함 때문에 나를 거부하는 심리가 있다고 한다.

마침 5월에 연휴가 있어 남편 형제들과 부부동반으로 여행을 떠났다. 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기 창문에 빗줄기가 쏟아진다. 비를 좋아하는 나를 위한 전주곡 같았다. 마음도 몸도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계림의 5월은 우기다. 첫날은 그런 대로 좋았다. 땀을 흘리는 것보다 비에 젖는 것이 활동하기 수월하다는 의견이었다. 모자와 선글라스는 가방 깊숙이 넣었다.

다음 날도 비가 왔다. 계림은 3만 6천 봉우리가 있다고 한다. 크기도 모양도 비슷비슷한 봉우리는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면서 산안개를 품었다. 산은 깊고 골짜기는 고요하다. 굽이굽이 길을 버스가 달리는 동안 산안개가 펼쳐주는 자연은 예술이다. 한 올 한 올 풀어놓으면 허공은 깊은 바다가 된다. 잔잔한 물결에 이끌리는 순간 빗줄기에 봉우리는 사라지고 빗소리만 남는다.

햇볕이 산꼭대기에서 쏟아진다. 초록빛이 일렁인다. 산안개도 힘차다. 휘몰아치듯 달려들었다가 흩어지고, 다시 고요해진다. 무형식의 아름다움, 작품은 순간순간 바뀐다. 스토리는 보는 사람 마음이다. 나는 길을 생각한다. 바람이 산꽃을 찾아다는 길, 신선이 다니는 자욱길, 극락에 오르는 길이 있다면 무한한 산안개 속이리라. 신비롭고 아름답다.

산 빛은 맑은데 비가 내려 이강은 흙탕물이다. 그러나 맑을 때는 바닥도 보이고 물고기들이 노니는 것도 보인다고 한다. 일찍이 이강의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으니 독립군이다. 은신처를 옮겨 다니던 독립군은 계림으로 온다. 끝없이 이어지는 기암절벽과 아름다운 이강을 보자 지나치지 못한다. 뗏목을 타고 물놀이를 즐긴다. 강물에는 시름을 담가놓고 흐르는 물결에는 조국광복의 희망을 실었으리.

잠깐 동안 꿈같은 낭만을 즐기던 광복군을 생각하며 뗏목에 올랐다. 플라스틱이다. 안전을 위해 대나무 대신 플라스틱을 사용한다고 한다. 느리게 움직이는 뗏목에서 산봉우리를 올려다본다. 바위 위에 나무가 우거졌다. 숲인가 다시 보면 바위다. 바위 색깔도 독특하다. 바위마다 감싸고 흐르는 듯한 검은 선이 마치 먹물 같다. 바위 위에서 먹물을 쏟으면 내려오는 먹물의 형태가 저럴까. 힘차고 유연하면서 담백하다. 강물에서 감상하는 기암절벽은 절경이다.

셋째 날도 비가 왔다. 마르지 않은 옷에 또 비를 맞아 냄새가 났다. 마음도 몸도 조금씩 지쳐갔다. 별일도 아닌 것에 민감하고 짜증 섞인 말들이 오갔다. 또 오랜 감정의 씨앗을 발아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동안 쌓인 좋지 않은 감정들이 새싹 올라오듯 나와서 심기를 건드렸다.

여행하면 사람이 보인다. 그 사람의 면모를 알게 된다. 나도 내가 보인다. 그래서 부족한 나를 채우고 새로운 만남을 통해 나를 찾기 위해 여행을 즐긴다.

가정의 달 5월, 그래서 떠난 가족여행은 형제들 간의 옹이진 상처와 적개심으로 웃으면서 헤어지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에 갇혀 고집 세우는 우매함, 자기애에 빠진 이타심, 이해타산만을 쫓는 약삭빠른 행동, 여행이 아니고 환경이 좋았다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계림에 오면 누구나 신선이 된다고 한다. 아름다운 자연과 합일되고 그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내려놓으면 신선 같은 자유를 얻는 걸까. 관계의 지속성에 대해 고민에 빠졌던 나는 돌아와서야 신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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