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作 무심벚꽃
장영주 作 무심벚꽃

시인 한병호는 청주의 무심천을 노래한다. '무심천을 바라본다. 흐르는 물빛도 떠다니는 유람선도 없다. 하루 종일 바라봐도 아무 것도 없다. -중략- 무심천은 이대로가 좋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대로가 좋다.' 교육이란 무엇일까? 우리 조상님들은 진짜 부모님은 '천지부모(天地父母)'라고 가르치셨다. 천지부모는 '텅 빈 하늘이요, 생명이 가득한 땅'이시니 언제까지나 자식에게 왜곡 되지 않은 가장 순수하고 큰 사랑을 주실 수 있다. 천지부모처럼 완전하게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는 법은 무엇일까. '가르친다'는 말은 '가르다'와 '친다'라는 두 가지 뜻의 합성어이다. '가르다'는 도리와 사리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이요 '친다'는 '소와 돼지를 친다'는 말이 있고 옛날에는 '부모님을 친다'고도 했으니 곧 양육한다는 말이다. 즉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 주고, 몸의 생명력을 육성해 살려주는 것이 '가르친다'의 완전한 뜻이다. 그러니 청주는 '교육의 도시'라는 별칭은 공업의 도시, 상업의 도시라는 말보다 얼마나 높은 가치가 깃든 도시인가. 그렇다면 교육의 본질은 무엇일까? 한민족의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이신 '참전계경(參佺戒經)'에서는 '교육'을 다음처럼 말씀하신다.

교(敎), '가르침'이란 사람의 떳떳한 도리를 알려주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배움이 있으면 100가지 행실이 그 근본됨을 얻고, 배움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목공이라도 먹줄이 없는 것과 같아서 중심을 잡지 못하듯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된다.

육(育), '기름'이란 가르침으로써 사람을 착하게 키우는 것을 말한다. 사람에게 일정한 가르침이 없으면 이것은 마치 옷에 깃을 달지 않은 것과 같고, 그물에 추를 달지 않은 것과 같아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제각기 자기주장만 일삼아 세상이 혼란해지고 만다. 따라서 하늘의 이치에 따라 사람을 가르쳐야 한다.

이 세상에 부모님이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터, 내 부모님 또한 누구로부터 오셨을까. 물론 친할아버지, 할머니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로부터 오셨다. 그렇게 위로 30대까지 올라가면 내 조상의 수가 1억 명이 넘는다. 약 천 년 전은 한민족의 인구가 기껏해야 몇 백만이었을 터이니 부모님과의 인연은 이미 족보와 민족의 개념을 넘어선다. 국제 연구진이 '사이언스' 지에 발표한 '포유류 계보'를 보자. "인간을 포함한 현존 태생 포유동물 5천100여 종의 조상은 쥐 크기의 네발 동물이었다. 그 동물은 백악기 말 공룡 멸종 직후 등장했으며 털이 복슬복슬 한 긴 꼬리를 갖고 재빠르게 움직이며 벌레를 잡아먹었다." 쥐의 모습을 한 우리의 선조를 넘어 더욱 올라가 본다면 결국 하나의 세포로부터 생명으로 이어져 내려 왔을 것이다. 그 첫 생명의 증거인 세포부모는 과연 누구일까? 하늘이 아니겠는가?

이는 무심한 마음, 무심(無心)의 깨달음이 아니면 도저히 볼 수 없는 진리이다.

청주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물은 무심천(無心川)이고 주산은 송아지가 어미 소를 찾듯이 간절하게 깨달음을 찾아가는 십우도(十牛圖)의 상징인 우암산(牛巖山)이다. 그 정신으로 부터 나온 청정한 문화가 '청풍명월'(淸風明月)이다.

키워드

#장영주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