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며칠 전 저녁, 운동 삼아 호암지를 한 바퀴 돌려고 집을 나섰다. 한 10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낮에 그렇게 후텁지근하더니…, 곧 비가 쏟아질 태세다.

안되겠다 싶어 집으로 돌아가 우산을 쓰고 다시 호암지로 향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처음에는 음악소리처럼 참 맑고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앞이 안보일 정도로.

다시 집으로 가야하나? 그냥 호암지를 돌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래, 그냥 돌자.'

우산이 날아가지 않게 꼭 잡고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비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바지가 몽땅 다 젖고 흙까지 튀었다. 신발도 다 젖고 양말도 젖었다. 잘못했다간 우산도 훌러덩 뒤집힐 판이었다.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 흠뻑 비에 젖은 내 모습에서 오래 전 비가 떠올랐다. 학창시절부터 유난히 비를 좋아했다. 어떤 날 밤엔 빗소리가 좋아 또 모습이 좋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비에 관한 노래를 많이 알고 있다. 지금도 가끔 라디오에서 '빗물'이나 '유리창엔 비' 같은 노래를 들으면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우리 집에 수도가 생긴 것은 초등학교 5학년쯤인가 싶다. 그 전에는 동네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수도가 생긴 이후에도 물은 여전히 귀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집에 있는 커다란 고무다라이나 양동이를 처마 밑에 내다 놓았다. 그렇게 고인 빗물로 설거지도 하고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았다.

스무 살 때 무엇인지 모르지만 삶이 참 쓰다고 생각되던 날이 있었다. 그런 날 밤에 오늘 호암지에서 만난 거센 비를 만났다. 우산도 없이 고스란히 그 비를 맞고 걷고 또 걸었다. 아무도 없는 새벽길을. 그런 비가 정말 시원했다. 무언가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탁'하고 사라지는 것 같았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그런데 지금은 비가 오면 우산부터 찾는다. 누군가에게 비를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빗물이 아깝다는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집안에 있는 화분을 모두 밖에 내 놓는다. 그럼 힘없이 축 쳐진 잎사귀들이 빗물을 먹고 초록으로 반짝인다. 참 신기하다. 물의 힘은 세다. 또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더러는 '쿵' 마음을 울리기도 한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잘 듣고 있으면 꼭 노래 소리 같다.

그런데 실제로 독일 드레스덴의 쿤스트호프파사쥐에는 비가 오면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건물이 있다고 한다. 빗물이 건물 외벽에 있는 깔때기와 파이프를 타고 흐르다가 금속관 이곳저곳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 깔때기와 파이프는 트럼펫을, 금속판은 실로폰을 닮았다. 비가 오는 날, 노래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평소 보다 많이 모인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 그런 건물이 있다면 나는 비가 오는 날 단골손님일 것이다.

또한 독일 베를린에 있는 '소니센터'는 빗물을 모으게 잘 디자인 돼 빗물로 건물 바깥을 청소하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가뭄 끝에 쏟아지는 비나 적당한 비는 참 좋다. 하지만 다가올 장맛비는 미리미리 피해가 없게 대비를 해야겠다. 가슴속에 비가 상처보단 좋은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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