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옥수수 수염과 옥수수 알의 숫자가 똑같대요"

산책 중에 옥수수밭이 스치기에 내가 말하자 일행은 미처 몰랐는지 신기해 했다. 선배 시인이 동의하며 말을 이어받았다.

"잘 봐. 이 옥수수 꼭대기에 있는 것이 꽃이야. 사람들은 꽃인줄 모르지. 그리고 꽃은 보통 여성으로 생각되잖아. 여자의 생식기에 해당된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이건 옥수수의 숫꽃이야. 거기서 꽃가루가 나와. 중간 줄기와 잎 사이에 암꽃이 있지. 바람 불 때나 성숙되어 꽃가루들이 떨어지면 암꽃이 받지. 그래서 수정이 돼. 옥수수가 열리며 옥수수 수염 하나에 옥수수 알 하나로 일치되는 거지"

꽃에 대한 기존 지식이 깨지며 새로운 세계로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꽃 색깔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뭔지 알아?"

우리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노랑. 주황, 빨강. 보라, 흰색 등등의 말들이 나왔다.

"아니야. 녹색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묘한 흥분이 일었다.

"우리 눈에 인지되지 않아서 그래. 눈에 잘 뜨이지도 않고"하며 그가 말한 내용은 이랬다.

꽃이 노랑, 주황. 빨강, 보라 등으로 화려한 것은 나비나 벌을 유혹해 번식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가령 옥수수는 자웅동주이다. 암수가 한 포기에 같이 있는 것이다. 숫꽃에서 꽃가루가 떨어지면 암꽃이 받기에 나비나 벌을 유혹할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꽃이 화려하거나 현혹적인 색이 될 필요가 없다

나는 꽃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지만 꽃을 좋아하고 식물의 세계에 경이를 느껴왔다. 녹색 꽃에 대한 뜻밖의 조명은 그런 나를 확연히 새롭게 해주고 있었다. 더욱이 에너지와도 관계 있어 보였다. 꽃이 노랑이나, 주황, 빨강, 보라로 되기 위해선 그만큼의 에너지가 쓰일 것 같았다. 녹색은 잎과 유사해 상대적으로 적게 쓰일 것 같았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꽃은 이렇게 녹색 꽃처럼 수수한 것부터 노랑, 주황, 빨강. 보라, 흰색 등등으로 색채만 하더라도 놀라운 스펙트럼을 지닌다. 식물의 세계를 다양성으로 정의하는데 꽃 색채의 다양성도 그에 일조할 것이다. 다양성이란 것은 일원성에 대립되는 것으로 그 하나하나의 독자성이 모두 인정되는 가치가 있다. 그런 면에선 수수한 녹색 꽃이나 화려한 색채의 꽃들이나 모두 동등하다. 그러나 보다 세밀하게 들어가면 이렇듯 차이들이 발생한다. 색채가 강한 꽃들이 수정을 위해 촉매를 현혹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라고 한다면 수수한 색의 꽃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와닿는 것이다.

다양성이 좋은 가치로 자리매김 되면서 모든 것들이 다양성의 이름으로 가치 인정을 받으려 하고 그렇게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다양성의 내부를 깊게 들여다보지 않거나 다양성의 철학을 제대로 정립하지 않는다면 다양성을 빙자한 폭력도 생기게 된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일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이기심을 위한 행동이나 심지어는 파렴치한 행동도 다양성을 선언하면서 그 아래 숨어 버린다. 그럴듯한 간판 뒤에 은닉한채 뻔뻔한 짓을 자행하는 것이다. 다양성의 폭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것에 대해 꽃들이 전해주는 수수함과 화려함의 이야기는 다양성의 내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다양성 안의 차이, 무엇이 조화이며 무엇이 폭력인가에 대한 은밀한 암시일 수도 있다. 꽃은 인간에게 놀라운 선물들을 늘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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